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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경제팩트] '간판'이 좌우하는 시장, 소설·취업·소송의 공통점

정보 비대칭 해소 어려워 '인증' 역할하지만 부작용…아직도 많은 변화 필요

2018.05.21(Mon) 11:17:16

[비즈한국]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늘 잠이 부족한 데다, 특히 주말에는 밀린 숙제 하느라 예전에 같이 다니던 도서관 한번 가기 힘들다. 30년여 전 대학 입학시험 공부하면서 “이걸 배우는 게 세상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나”라고 투덜댔는데, 어째 한국 사회는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아무 경력 없이 노동시장에 자신을 팔아야 하는 구직자들은 기업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는 데, 이 역시 본질은 ‘좋은 간판을 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잔디마당에서 열린 ‘2017 대한민국 청년일자리박람회’에 참석한 취업준비생들이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사진=비즈한국DB


한국 사람들은 어쩌다 시험에 목을 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장강명 작가는 장편소설 공모전을 다룬 르포, ‘당선, 합격, 계급’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판은 왜 중요할까? 어느 때 간판이 가장 중요한가? 가게 안에 들어가서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우리는 간판을 큰 기준으로 삼는 수밖에 없다. 

 

책은 특성상 내용물의 질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품이다. 오죽하면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겠는가. 화려한 장정에 으리으리한 추천사가 달린 책이 시시하기 이를 데 없고, 표지 디자인이 너무 촌스러워 오래도록 손이 가지 않았던 서적이 막상 펼쳐 보니 대단한 작품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소설은 더 그렇다. (중략) 교양서적이라면 중간의 한 장을 골라 살펴볼 수도 있겠고, 학술 도서라면 해제를 읽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은 그럴 수 없다. 멋진 프롤로그가 그 뒤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 책 308~309쪽

 

구구절절 동의한다. 필자도 장강명 작가처럼 1년에 수백 권의 책을 읽지만, 신인이 쓴 소설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출장 가는 길에 자주 읽는데, 긴 시간 투자했다가 실망감만 남으면 그 ‘기회비용’이 꽤 크기 때문이다. 일단 책값도 아깝고, 두 번째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새로운 책을 구입할 방법이 없어 남은 시간을 후회 속에 보내야 한다. 

 

결국 소설을 고를 때에는 검증된 저자,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나 알랭드 보통의 책을 고르곤 한다. 그러나 누구나 필자처럼 행동하면, 처음 ‘시장’에 나오는 작가. 다시 말해 신인들은 책을 팔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알랭드 보통도 첫 번째 책을 낼 때에는 ‘신인’이었다. 

 


대다수의 독자들이 신인작가의 책을 기피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작가를 영영 만날 수 없게 된다. 장강명 작가는 이 대목에서 ‘공모전’의 존재 의의가 있다고 한다. 

 

한국 문학계에서는 작가가 (공모전이나 신춘문예 같은 대회를 거쳐) 등단했다는 사실, 작품이 전문가들이 심사하는 콘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사실이 그런 인증 마크가 된다. 소설 공모전을 여는 출판사들은 그 공모전이 신인 발굴의 역할만 한다고 여길지라도, 독자들은 그것을 인증 절차(간판)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인증 시험에 ‘합격’한 작가는 그나마 독자를 만날 수 있고, 인증 마크를 얻지 못한 작가는 불합격자 취급을 받게 되어 더 외면당한다. 그럴수록 작가 지망생 사이에 시험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공모전에 몰리는 작가 지망생이 많아지면 간판의 가치도 그 만큼 올라간다. - 책 309~310쪽

 

꽤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어째 취직 이야기랑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학벌은 문단의 ‘공모전’에 일치하는 것 같고, 더 나아가 장편 소설일수록 내용물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사람을 겉모습만 가지고 평가하기 힘들다는 각 기업 인사담당자들의 한숨과 엮이기 때문이다.  

 

첫 직장을 구하는 대졸자 및 대졸 예정자의 사무직 업무 능력은 매우 판단하기 어렵다. 경력이 있다면 그동안의 실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함께 일한 동료들의 평판을 들어볼 수도 있다. (중략) 

 

아무 경력 없이 노동시장에 자신을 팔아야 하는 구직자들은 기업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는 데, 이 역시 본질은 ‘좋은 간판을 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여러 간판 중 한국 기업들이 매우 중시한다고 알려진 간판이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다. - 책 310~311쪽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대학의 간판만 보는 현재의 시스템이 지속되는 것은 여러 부작용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에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학생이 대학 가서 공부에 취미를 붙여 실력을 쌓았다 하더라도 ‘간판’에 밀려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건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까? 

 

더 나아가 앞에서도 적었던 것처럼,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해 치르는 시험의 내용도 문제다. 수학부터 국어 영어 과학으로 이어지는 과목들이 정말 경제인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정보인가? 장강명 작가는 이런 상황이 ‘대학 간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소비자들에게 대표적인 ‘깜깜이’ 시장 중 하나가 법률 서비스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변호사 광고글은 많이 찾을 수 있고, 변호사회의 서비스를 이용하면 변호사의 학교나 연수원 기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변호사가 재판정에서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런 때에 많은 사람이 간판에 의지하지 않을까? 어느 대학 법대를 나왔는지, 사법고시 출신인지 아니면 로스쿨 출신인지 등을 따지는 것이다. (중략) 

 

만약 어느 변호사가 어떤 소송을 잘하는지, 재판에서 얼마나 이겼고 졌는지를 모든 사람이 금방 찾아 볼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 이러면 이런 간판 문제는 금방 해결되지 않을까? - 책 322~323쪽

 

굉장히 좋은 이야기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 2000년대 초반 ‘로마켓’이라는 벤처기업이 변호사의 승소/패소 정보를 데이터로 베이스로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로마켓은 끝없는 소송을 견디지 못하고 몇 년 못 가 사업을 접었다고 한다. 

 

결국, 한국은 대부분의 영역이 깜깜이 판이다. 구직자와 구인자, 그리고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른바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공개되고 또 대중들에게 원활하게 유통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 정보공개가 쉽지 않다. 

 

장강명 작가가 속한 도서 시장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당장 필자만 해도 블로그에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올리고, 이 서평 등을 통해 조금이나마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소시켜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취업시장 등 간판이 큰 영향을 미치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시장은 아직도 많은 변화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간판이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 것에 사과하며, 오늘 소개한 책 ‘당선, 합격, 계급’이나 아들 녀석 손에 쥐어주어야겠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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