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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신나는 식감, 꽉 찬 단맛 '제주 월동무'

무는 추위를 좋아하는 채소지만 올 겨울 한파와 폭설로 작황 부진

2018.03.06(Tue) 09:48:36

[비즈한국] 재작년이었던가? 1월 엄동설한에 흙 묻은 박스 하나가 택배로 왔다. 생일 선물로 ‘무’를 받았다. 제주도에 귀농해 사는 ‘무 요괴’라는 친구가 텃밭에 키운 것을 주섬주섬 싸서 보내줬던 그 선물이 그 해 가장 기쁜 생일 선물이었다. 생일잔치보다 신나는 제주 무 잔치!

 

겨울의 제주 무는 흠 잡을 데가 없다. 단단해서 아작아작 씹히는 것이 과자보다 맛이 있고, 머리부터 뿌리 끝까지 달지 않은 곳이 없어 케이크보다 낫다. 들기름에 생강, 마늘 넣고 무나물. 싱싱한 고흥산 깐 굴을 구한 날이면 맑고 시원하게 굴국. 밥에 넣고 지어서 달달하고 촉촉한 무밥. 한 상 가득 무로만 채워져도 신이 난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풍족한 선물에 깍두기며 동치미도 출동했다. 고흥 굴을 또 한 번 구해와 나박나박 썬 굴깍두기에, 영하 20℃가 우스운 겨울 날씨 덕분에 날을 세운 듯 쩡한 국물이 배어 나온 동치미까지, 그해 겨울은 맛있었네.

 

한파와 폭설로 못 먹을 뻔했다가 친구 덕분에 올해도 챙겨 먹은 제주도 월동무. 단단하고 치밀해 식감이 신나며, 머리부터 뿌리 끝까지 꽉 찬 단맛도 일품이다. 사진=이해림 제공

 

제주도에서 무를 키운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조금씩 시도하다가 본격적으로 겨울 특화 작물로 무를 키우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의 일. 

 

농촌진흥청 원예특작과학원 채소과 최승국 박사에게 물어보니 고랭지 재배용으로 개발된 ‘관동여름무’를 겨울철 온화한 제주에서 심어봤더니 맛도 좋고 작황도 좋아서 제주도 월동무가 시작됐다고 한다. 같은 시기 경쟁 관계 품종이었던 ‘멋진맛동무’ 품종이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고 사랑을 받아 현재는 제주도 월동무 생산의 95%를 점유한다는 것이 최 박사의 설명이다.

 

소비자들의 생활 양상이 변화하며 겨울 김장 수요가 줄어들었고, 냉장 농산물 유통도 정착되어 싱싱한 채소를 겨울에도 먹는 풍토가 되어 제주도의 월동무는 빠르게 시장에 안착했다. 덕분에 한겨울에 가장 맛난 무를 한 해 내내 기다렸다 먹는다.

 

제주도의 월동무는 왜 그토록 유독 맛이 좋은가. 최 박사에게 과학적인 근거를 물었다. 추운 것을 좋아하는 채소인 무는 적당히 추운 데서 천천히 세포를 분열시키며(속이 치밀해진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영양을 축적한다(달다). 겨울이 더우면 웃자라 맛이 맹맹하고, 살기가 너무 힘들면 스트레스를 받아 아린 맛을 뿜어대는데 제주도의 겨울은 무가 느긋하게 맛있어지기에 딱 좋은 기후를 보인다는 것. 

 

그래서 아린 맛이 나는 녹색 부분마저도 달지, 맵지가 않다. 안 그래도 무가 좋아하는 제주도의 겨울인데, 멋진맛동무는 더군다나 제주도 겨울 기후에 최적화된 품종이니 그야말로 완벽하게 맛있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올해는 멋진맛동무를 3월로 접어든 이제야 만났다. 수확이 갓 시작된 시기부터 제주도 날씨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첫물을 놓치고 나니 한파와 폭설이 덮쳐 제주 무 찾기가 어려워졌다. 아닌 게 아니라 초기 출하 후 절반 이상이 냉해를 입어 폐기하는 등 피해가 막심하다고 하니 올해 제주도 월동무 생산 농가의 고통이 이만저만하지 않을 듯하다.

 

‘무 요괴’ 친구의 밭도 사정이 다르지 않아 무 밭을 갈아엎었다. 그나마 마당 텃밭에 있어 무사히 추위를 견딘 무를 주섬주섬 모아 여섯 박스(60~70kg)쯤 만들었다나. 고맙게도 때 늦은 생일 선물을 올해도 챙겼다. 

 

텃밭 주인에게 무 말고도 겨우내 일이 많아 방치 농법(?)으로 자란 무는 모양도 제멋대로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박스에 담긴 꼬라지를 보고 혀를 끌끌 찼던 것도 사실이다. 고개를 15도쯤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꺾고 무 하나를 썰어 입에 넣어 보니 건방진 혀가 쏙 들어가고, 차렷 자세가 절로 나온다.

 

아아, 달다! 달고 맛있다! 아삭거려!!! 머나먼 서울에서 봄을 맞이하다가, 난 데 없이 제주도의 겨울이 훅 들어왔다. 겨울에 이 맛을 못 보고 봄을 맞을 뻔했다니, 깍두기 할 무를 썰다가 절반은 다 집어먹으며 나는 우물우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도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맛나는 무를 먹고 무사히 겨울을 보낸다. 하늘이 돕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겨울을 놓쳐 깍두기 담을 굴도 시시해졌고, 동치미 담을 동장군도 물러갔지만 뭐 어떤가. 내겐 맛만 좋은 제주도 월동무가 한 동가리나 있다. 

 

주말엔 고추씨를 넣어 깍두기를 담았고, 내일은 무나물을 해 흰 쌀밥에 말듯이 비벼 먹을 것이며, 돌아오는 주말엔 달래양념장에 무밥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두툼하고 달달한 조개가 시장에 당도하도록 봄이 깊어지면 조갯국도 실컷 끓여 먹을 작정이다. 

 

어라, 그러고 보면 무는 봄에도 참 맛난 식재료이지 말입니다.​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라이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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