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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김제, 가을 들녘에 퍼진 석양과 문학의 향기

2016.09.13(Tue) 14:44:11

김제의 가을은 온통 노란빛, 황금과 주홍을 적절히 섞은 빛깔로 가득할 것이다. 땅과 사람이 일궈낸 광활한 평야에서 가을의 빛깔을 끌어 올리고, 하늘은 그 수고의 보상으로 그 어느 곳과도 비견할 수 없는 낙조의 풍경을 선사한다. 또 생생한 역사와 문학의 현장이 곳곳에 있어 이 계절에 썩 잘 어울리는 여행이 되어 준다.

땅의 산물이 풍성하고, 그래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눈빛과 마음까지 더불어 넉넉해지는 곳. 사람들도 땅을 닮아 인심이 유달랐고, 서두르거나 거칠지 않음을 그간 여러 번의 김제 여행을 통해 기억한다. 매년 가을이면 버릇처럼 김제로 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물창고’ 금산사의 미륵전

김제를 좀 안다는 이들은 금산사로의 여행을 먼저 권할 것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통일신라의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진표율사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그 규모를 키웠다고 전해진다. 대충 따져도 세워진 지 1400년이 넘은 고찰. 그러나 사찰을 찾아가며 아름드리 나무가 좌우에 늘어선 길에서 온몸을 휘감는 맑고 가벼운 공기와 만나는 순간, 머릿속에 남아 있던 숫자와 역사적 의미보다 아늑함과 고즈넉함이 마음을 채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을 모았고, 그 뒤로는 불법을 가르치는 공간으로 쓰였다는 누각이자 출입구인 보제루를 지나면 그제야 널찍한 마당과 금산사의 주요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선 불가에서 깨달음과 성불을 상징하는 보리수나무 두 그루를 마치 기준점인 듯 삼아 정면으로 대적광전이 자리한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데,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6보살이 빼곡히 배치되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적광전 뒤로 나한전과 삼성각 등이 배치되어 있다.

   
보물로 가득찬 금산사에서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는 미륵전.

대적광전 앞마당에 세워진, 1000여 년 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육각다층석탑을 비롯해 사방을 둘러보면 절사라기보다는 고고학 박물관과 다르지 않을 만큼 국보와 보물들로 수두룩하다. 사찰이 보유한 유적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이 한 점, 보물 열한 점, 사적이 한 점에 이른다. 여기에 굳이 공인받지 않은 유물 유적까지 포함하면 ‘보물창고’라는 말이 결례는 아닐 듯싶다.

이 숱한 보물들 가운데 금산사를 찾은 이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것은 단연 미륵전이다. 한눈에도 고색창연이라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3층 전각의 미륵전은 하늘을 향해 호기롭게 뻗어 올린 지붕을 층층이 펼쳐내어 장엄미를 선사하고 있다. 높이는 무려 20m에 이르는데, 오직 목재만을 이용해 이만한 높이를 올렸다는 사실은 보면서도 쉬 믿기지 않는다.

국보 26호인 미륵전으로 들어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웅장한 미륵보살상이 또 한 번의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높이 11.82m의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8.79m의 법화림 보살과 대묘상 보살이 미륵을 호위하고 있다. 모두가 금빛으로 빛나는 보관을 머리에 이고 있는데 특히 보살들의 보관에 더해진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은 목이 아프도록 한참이나 올려보게 한다.

불교 예술과 건축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 외에 금산사 미륵전의 가치가 독보적인 것은 일종의 구원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불교의 미륵 신앙 덕분이었다. 미륵은 역사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녔으면서 종종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는 야심가들의 철학적 배경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비록 미륵이 현신하지 않더라도 이 사찰이 뻗어내는 장엄함에 더해 이곳을 둘러싼 넉넉한 자연이 이룬 조화만으로도 어쩌면 사람들은 더 큰 위로와 의지를 경험하고 돌아갔을지 모른다.

 

김제지평선축제와 소설 아리랑의 땅

김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농경 지역으로 오랫동안 대접받고 있다. 그 존재감을 확연히 증명하는 곳이 바로 ‘벽골제’이다.

벽골제는 330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저수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완성하기 위해 연인원 32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전해진다. 제방이 축조된 뒤 김제는 넓고 비옥한 평야를 두게 되었지만 조선 중기 이후 방치되면서 흔적은 거의 사라졌고, 지금은 약 3km에 이르는 제방과 석조 수문인 장생거, 기념비 등이 남아 당시의 방대한 규모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벽골제 주변으로는 김제와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전통을 알리는 ‘벼고을농경문화테마파크’가 조성돼 전통 농경문화와 관련한 자료와 유물 등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제방 앞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볏짚으로 만든 쌍용을 상징하는 높이 15m, 길이 54m의 거대한 철제 조형물이 있다. 옛 유적의 빈자리를 조금은 억지스럽게 메우려 애쓰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곳을 중심으로 매년 10월 전후 우리나라 전역의 많은 축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내실 있기로 소문난 ‘김제지평선축제’가 열린다(올해는 9월 29일부터 10월 3일까지).

   
벽골제 주변으로는 ‘벼고을농경문화테마파크’가 조성돼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곳이면서 너른 논을 둔 고장이라는 풍족한 역사는 한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대표적인 쌀 수탈지라는 수난사로 이어졌다. 이 역사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 바로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이다. 그래서 김제는 <아리랑>의 문학 여행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작품의 공간적, 역사적 배경 대부분이 김제와 김제 들녘이어서 여행의 깊이와 의미를 더하고 있다.

<아리랑> 문학 여행의 여정은 벽골제 바로 건너편의 ‘아리랑문학관’에서 시작했다. 소설 <아리랑>과 관련한 모든 정보와 자료, 작가가 작품의 완성을 위해 쏟았던 열정이 고스란히 망라된 공간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여정을 보기 쉽게 지도화해 놓은 자료를 비롯해 시대별 실제 사료들도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그러하다 보니, 문학관 자체가 숫제 일제 침탈의 시기를 담은 미니 역사관이나 다름없다. 이와 더불어 작품의 줄거리와 인물 소개뿐만 아니라, 작가의 초고 원본과 콘티 형식으로 그려 놓은 스케치, 소설의 구성을 위한 취재 노트와 카메라를 비롯한 도구들, 원고 집필에 소요된 볼펜 등이 찬란한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다. 1년간 김제를 비롯해 인근 고장과 전국 곳곳을 다녔음은 물론 하와이와 러시아, 중국 등을 거침없이 오가며 벌인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된 200자 원고지 2만여 매에 이르는 대작 <아리랑>의 출생 증명과도 같은 소중한 자료들이다.

김제의 여러 곳이 <아리랑>에 등장하지만 그 가운데 특히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곳이 죽산면 일대이다. 이 죽산면의 홍산리에 일제강점기 당시 주수탈기관이던 면사무소, 일제 경찰이 상주했던 주재소, 우체국, 정미소 등을 비롯해 소설 속 인물들이 거주했던 옛 집들을 조성해서 작품 <아리랑>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도록 한 ‘아리랑문학마을’이 있다.

당시의 유물을 현실감 있게 전시하면서 일제에 고통받던 김제 사람들의 역사를 소설의 주요한 문구를 들어가며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또한 1909년 당시 중국 하얼빈역을 60% 크기로 복원하고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조각으로 재현해, 김제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전역, 그리고 먼 중국과 러시아, 하와이 등까지 이어졌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남김없이 전하고 있다.

   
‘아리랑문학마을’에는 소설 속 배경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재현해 놓았다.

죽산면 소재지로 접어들면 영화세트를 보고 있는 듯 반듯한 길 좌우로 오래된 단층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 길에서 잠시 벗어난 자리에 당시 실제로 농토 수탈에 주도적이었던 대농장주 하시모토의 건물이 제법 규모 있는 모양새로 자리하고 있다. 죽산면의 농토 가운데 절반을 소유하고 600여 명의 소작인을 부렸던 이 인물은 소설에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죽산면 일대에서 가장 번듯한 서양식 건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잠시 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숱한 농민들이 이 건물을 드나들며 수탈의 억울함과 분노로 가슴을 쳤었으리라는 생각에 수려한 ‘근대문화유적’의 외관이 곱지 않아 보인다.

 

지평선과 수평선, 그리고 노을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김제의 풍경을 완성하는 절정은 역시 이곳이 자랑하는 지평선 들녘이다. 산이 많은 우리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펼쳐진다는 김제평야. 그 너른 평야의 모습이 호주나 북미대륙의 광활함보다는 넓은 자락 가감 없이 펼쳐낸 치마 한 폭 보는 듯해 오히려 정감 있다.

여러 곳을 두고 이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말들은 분분하지만, 사실 김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좌우 막힘없이 탁 트인 평야에 들어서게 된다. 특히 부량면으로 향하는 반듯한 직선로인 벽골제로를 따라 드라이브 한다면 한참이나 펼쳐지는 좌우의 똑같은 풍경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우리나라 어디에서건 내륙에서 이만큼 막힘없는 시선을 둘 수 있는 곳은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제의 풍경을 완성하는 절정은 역시 지평선 들녘이다. 

또 앞서 들렀던 죽산면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가면 광활면에 이르는데, 이곳에서도 예의 지평선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광활(廣活)면. ‘막힌 데 없이 넓게 트였다’는 뜻의 광활(廣闊)과는 한자를 달리하지만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광활면의 지평선에는 개펄을 간척해 평야가 된 사연이 숨어 있다. 이곳 광활면에서도 진봉면 일대에 접어들면 시원스레 펼쳐진 들녘과 더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조금 더 높은 시선에서 보고자 한다면 해발 72m의 진봉산 정상에 있는 ‘진봉망해대’ 혹은 ‘망해사 전망대’가 그만이다.

어딜 가나 산이 가까운 우리네 지형과 달리 산은 멀고 하늘은 땅과 맞닿아 있는 김제지평선을 가장 또렷이 볼 수 있는 곳. 전망대에 오르면 자로 잰 듯 반듯한 농토가 카펫을 펼쳐 놓은 풍경으로 시원하게 드러난다. 좌우를 봐도, 저 먼 지평선을 봐도 한눈에 헤아리기 쉽지 않은, 그저 벌어진 입으로 감탄사만 터져 나오는 장관이다.

소설 <아리랑>에서 작가는 김제의 들녘을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평야로 묘사했다. 이 광활한 평야의 풍경에서 그 표현이 한 치의 과장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른 가을이라 평야는 아직 초록이 여전하지만 금세 금빛으로 일렁이게 될 것이라는 상상에 잠시 잠겨본다.

장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왼편으로 몸을 틀면 광활한 평야이지만, 진봉산 자락을 넘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만경강 하구 심포 일대의 갯벌과 강, 그리고 저 멀리 새만금방조제로 이르는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한때 오가는 이 많아 분주했고, 갖은 해산물이 부려지던 심포항은 새만금방조제의 완공으로 제 구실을 못하기 시작하더니, 그나마 몇 척 오가던 배도 발길이 거의 끊어졌다. 심포항의 특산물로 이름 높던 백합조개를 구이로 즐기던 포장마차까지 죄다 사라져 버려 아쉬움을 남긴다. 몇 년 전만 해도 연탄불 위에 수북이 백합을 올려 입안 가득 쫄깃함과 포만감을 즐겼던 곳이다.

   
진봉망해대에서 바라본 낙조. 지평선과 수평선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서해에서도 손꼽히는 장관이다. 바다를 향한 강을 따라 구불구불 나란한 갯벌과 강, 저 먼 바다를 진한 주홍으로 물들이는 시간이면 해가 수평선 아래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한참을 봐도 지겹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과 수평선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 진봉망해대가 아닐까 싶다.

전망대 아래로는 소설 <아리랑>에도 등장하는 사찰 망해사가 있다.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자리에 지어진 작으나 묵직한 옛 기운이 스며 나오는 사찰이다. 사찰 바로 아래로 물결이 찰랑이고, 특히 여러 절사 중에서 동종각은 바다 가장 가까이 세워져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풍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여행 정보 문의

김제시 문화관광: http://culture.gimje.go.kr, 063-540-3031∼6

금산사: www.geumsansa.org, 063-548-0917

벼고을테마파크: http://tour.gimje.go.kr, 063-548-4441

아리랑문학마을: http://arirang.gimje.go.kr, 063-540-2929

아리랑문학관: http://arirang.gimje.go.kr, 063-540-3934

망해사: 063-545-4356

남기환 여행프리랜서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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