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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전북 순창, 붉은 고추장처럼 무르익는 가을로

2016.09.09(Fri) 18:06:10

개발의 몸살을 앓지 않은 강은 지나는 마을마다 그 폭이 제멋대로이지만 그래서 더 푸근하고 땅과 자연스레 어우러진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그 섬진강이 슬며시 들어왔다가 다시 휘돌아 가는 순창에 천천히 가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공기의 변화를 재빨리 알아챈 산은 슬슬 불그레한 옷을 챙겨 갈아입을 참이고, 여름 한철 빚어놓은 메주가 점점 단단해져 간다. 자연 그대로의 삶과 풍경으로 더 넉넉해지는 순창에 가을이 이만큼 가까이 와 있다.

 

이성계도 반했다는 순창 고추장의 맛

순창이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이들도 순창 하면 떠올리는 건 단연 고추장이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가 머물던 회문산 자락 만일사로 가다가 순창의 어느 농가에 들러 고추장을 곁들인 식사를 했는데, 그 맛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는 설화에서 순창 고추장의 명성은 시작된다.

물론 지금의 붉은 고추가 일본을 통해 이 땅에 들어온 건 17세기 초나 되어서니, 어딘지 맞지 않은 듯하다. 다만, 그것이 고추장의 전신이자 된장의 일종이었다는 추정은 유효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8세기 문헌에서 이미 순창 고추장은 명품 장으로 등장하니 그 이름값에 흠집이 나지는 않을 듯하다. 이 고추장의 고장인 순창을 대기업들도 앞다퉈 내세우며 다양한 종류의 고추장 제품을 선보였기에 순창의 이름은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우리 땅의 특산물들 가운데 브랜드화에 가장 성공한 사례가 ‘순창 고추장’인 셈이다.

   
순창 고추장은 메주 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고루 발효되게 만든다. 소담스런 장독대 풍경도 정겹다.

가을이면 순창은 고추장을 맛보러 온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순창읍에 자리한 순창전통고추장마을로 향한다. 원래 대대로 터전을 잡아온 마을이 아니라 순창 곳곳에서 나름 고추장 맛으로는 한가락 하는 가문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테마 마을이다.

산은 멀고 땅은 탁 트여 보기에도 푸근한 명당을 차지한 이 마을에는 서른 곳이 넘는 고추장 명가들이 한옥 지붕을 이어가며 길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그 지붕 아래로 들어서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장 담그는 비법으로 만들어져 무르익어 가는 고추장과 된장, 장아찌와 절임 등이 눈을 사로잡는다. 물론 기대했던 장독이 즐비한 예의 풍경도 어느 곳이나 어김없다.

이들 중 어느 가게를 찾아도 실망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장맛은 대동소이한 듯하면서도 가만히 찍어 맛을 보면 저마다의 개성과 비법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류도 다양하다. 보릿가루, 찹쌀가루, 매실 등으로 맛을 더한 고추장은 스테디셀러이고, 된장이며 건어물과 해산물을 더한 독특한 가공 장류, 절임과 장아찌도 그야말로 지갑 도둑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순창 고추장의 대표 품목인 찹쌀고추장을 덜어 맛보니 적당한 염도에 매콤함이 감돌다가 구수한 여운을 남겨 과연 순창답다는 감탄이 절로 터진다. 맛에 둔감한 이라도 보리고추장이나 매실고추장과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분간해낼 만큼 장맛의 선은 뚜렷하다.

 

고추장마을에선 아이들이 고추장 만들고 떡볶이 먹고

순창의 고추장 맛이 뛰어난 데는 여러 이유가 전해진다. 우선 섬진강 맑은 물이 기본기를 발휘하고, 여기에 연중 고르면서 여름에는 비가 많고 겨울에는 따뜻한 기후가 효모의 활발한 발효를 돕는단다. 여기에 타 지역에서는 보통 장의 주재료가 되는 메주를 겨울에 만드는 것과 달리 8월에, 그것도 고추장을 만들기 위한 메주만 따로 만들며 가운데 구멍을 내어 메주가 고루 발효되도록 한 점도 순창 고추장의 명성을 거들었다.

이 고추장을 만들어보고 싶다면 몇 곳의 체험 공간을 활용하면 된다. 전통고추장마을 내에도 장류 체험관이 있고, 개인적으로 고추장 만들기 프로그램을 준비한 곳들도 있다. 또 순창읍내에서 차로 20여 분 떨어진 구림면의 ‘고추장 익는 마을’도 들러볼 만하다. 앞서 이성계가 장맛을 봤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마을, 그러니까 순창 고추장의 시원지라 알려진 곳에 마을 주민들이 체험장을 운영한다.

   
아이들이 고추장 만들기 체험으로 완성한 고추장은 즉석 떡볶이에 사용된다.

마침 이곳을 찾았을 때 수학여행 차 순창을 찾은 중학생들의 고추장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체험장의 최영민 팀장의 지도에 따라 아이들의 서툰 손에서 새빨간 고추장이 완성되어 가고, 이를 이용해 떡볶이를 즉석에서 만들어 먹는다. 체험은 보통 2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고추장 만들기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마련한 여러 전통 체험 프로그램을 함께 하게 된다. 마을을 떠나는 아이들의 손에는 이날 갓 만든 고추장이 아닌, 이 마을에서 담근 1년 묵은 고추장이 선물로 들려진다.

 

강천산 단풍, 섬진강 풍경에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 순창 여행에는 고추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좀 안다는 이들 사이에서 ‘고추장처럼 붉은 단풍’으로 물든다고 알려진 강천산과 섬진강변의 절경이 남은 여정을 이끌어 갈 것이다. 강천산은 해발 583m에 숲이 울창하고 물이 맑고 넉넉한, 그래서 이 산을 찾으면 절로 몸속까지 정화될 것만 같은 그런 곳이다.

50m 높이에 길이 75m로 산과 산을 연결한 구름다리를 건너 정상에 이르는 동안 다양한 산세를 만끽하기 좋고, 무엇보다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나무 잎사귀가 온 산을 뒤덮는다. 굳이 큰 맘 먹고 등반 채비를 하지 않아도 평탄한 산길을 따라 단풍과 계곡을 즐기는 2시간여의 산책으로도 좋다. 높이 40m에 이르는 절벽에서 장쾌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병풍폭포와 1316년 창건된 고찰 강천사의 소담스러운 풍경, 아찔한 현수교를 지나 구장군폭포로 이어지는 산행도 큰 부담은 없다.

   
강천산의 ‘고추장처럼 붉은 단풍’. 아찔한 현수교를 지나 산행은 구장군폭포로 이어진다.

이제 산을 벗어나 순창의 기운을 맑고 넉넉하게 키운 주인공인 섬진강을 만나러 간다. 그 중 향가유원지는 꽤 넓어진 강물이 휘감듯이 마을을 돌아 나가는 풍경이 일품인 곳이다. 향기롭고(香) 아름답다(佳)는 이름에 한 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강과 주변 산세가 자아내는 장관은 흔하디흔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저 그림 같다.

보다 더 장쾌한 풍경을 마주하려면 향가다리에 오르면 된다. 섬진강 자전거길의 일부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당시 이곳을 지나는 철도를 내려다 중단되자 남겨진 터널과 교각을 활용해 만든 다리이다. 산허리를 이어간 다리이다 보니 다리 한가운데 서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꽤 아찔한 시선으로 향가의 장관을 두 눈 가득 담을 수 있다. 조물주가 산 사이를 푹 파내 강물을 채우고 그 물길을 거침없이 휘돌아 낸 듯 유려한 곡선이 기막힐 따름이다. 다리 중간에는 강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유리 바닥으로 짠 스카이워크를 만들어 놓아 담력 시험에 들게 한다.

이곳 향가유원지에서 북동쪽으로 강을 거슬러 40여 분 더 천천히 올라가면 낮고 좁아진 섬진강 상류가 만든 또 한 번의 장관을 만나게 된다. 섬진강 중류는 순창과 임실을 나누며 흐르는데, 그 경계에 자리한 장군목 일대이다.

산마을 사이를 조용히 지나는 강의 움직임은 향가와 다르지 않지만 더 낮은 시선으로, 마치 하천이 아닐까 싶을 만치 조용한 섬진강의 풍경이 여기에 있다. 그 강은 오랜 세월 바위들을 제멋대로 치고 지나가며, 바윗등에 생채기를 내 묘한 물방울 자국을 냈다. 이 바위들이 겹겹이 이어진 장군목의 풍경은 지구가 아닌 외계의 어느 계곡인 듯 신비로움이 감돈다. 강물에 깎인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어떤 것은 아예 ‘요강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모양새가 짐작되고도 남을 듯하다.

   
맑고 아름다운 섬진강변에는 강만큼이나 예쁜 작은 마을들이 여행객을 반긴다.

이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가면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선생이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읊었던 임실군의 천담, 구담, 진뫼 마을이 머지않다. 강을 사이에 두고 순창과 임실을 넘나드는 사이 아직 여전해서 더욱 반가운, 훗날 나이 들어 조용히 머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섬진강변의 작은 마을들로의 여행이 계속되는 것이다.

 

여행 정보

순창 여행 정보: 순창군 문화관광(http://tour.sunchang.go.kr)

 

고추장 익는 마을

주요 체험 프로그램: 전통 고추장, 전통 비빔밥, 인절미 등 다양한 전통 음식 만들기와 전통 공예 및 놀이 체험 등이 마련된다. 다만, 대부분의 체험은 30명 혹은 그에 준하는 인원 기준으로 진행되며 그 외 인원은 별도 문의해야 한다. 사전 예약은 필수. 문의: http://gochujangvillage.com, 063-653-7117

남기환 여행프리랜서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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