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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데이] 추석이면 그리워지는 나훈아

천재적인 꺾기 창법,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트로트 황제

2016.09.15(Thu) 17:45:44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아와 반겨주겠지.” -<고향역>

“냉정한 세상 허무한 세상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세상 팔자라거니 생각을 하고 가엾은 엄니 원망일랑 말아라.” -<건배>

   
▲ 나훈아가 2008년 1월 당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뽕짜자 뽕짝, 리듬이 살아 춤을 춘다. 불세출의 트로트 황제 나훈아의 곡이다.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이 찾아왔다. 몇 년 전만 해도 추석과 설날 등 명절을 대표하는 가수의 대명사는 나훈아였다. 방송사들은 명절 때마다 나훈아 모시기에 온갖 노력을 다하던 시절이 있었다. 리사이틀 형식의 프로그램 <나훈아 콘서트>를 방송하기 위해서였다.

귀향의 벅차오름을 그대로 드러내는 <고향역>. 고향에 못가는 절절한 향수를 그린 “머나먼 남쪽 하늘아래 그리운 고향”으로 시작하는 <머나먼 고향>은 민족 대이동이 이뤄지는 명절엔 그야말로 딱인 노래다.

그는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과 무려 800여 곡을 작사 또는 작곡한 싱어송라이터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2500여 곡을 취입하고 정규 앨범 19장을 포함한 200여 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나훈아는 최홍기란 본명으로 부산에서 태어난 경상도 사나이다. 가수의 운명은 1965년에 형을 따라 서울에 올라와 서라벌예고에 입학하면서부터 찾아왔다. 라틴족처럼 보이는 이국적인 마스크에 부드러운 중저음의 바리톤 음색을 가진 그를 대중음악계는 주목했다. 고교 2학년 되던 해 나훈아는 오아시스레코드와 계약해 <천리길>을 발표하면서 데뷔한 후 신화를 써 나갔다. 

나훈아의 트레이드 마크는 속칭 우라까이로 불리는 천재적인 ‘꺾기’ 창법이다.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면 머리, 어깨와 허리 등을 자주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꺾기의 비법이다. 이를 통해 살아 숨 쉬는 리듬감을 연출하고 고음 부분도 소화할 수 있었다. 

무대 매너에서도 특유의 카리스마가 철철 넘쳐흘렀다. 그는 노래할 때마다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노래 중간 카메라를 노려본다거나 노래가 끝날 때면 옆구리에 팔짱을 끼고 이를 싱긋이 드러내면서 뇌쇄적인 웃음을 보였다.

콘서트의 흥이 한층 고조될 때면 그는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밤새도록 할까예. 밤새도록 하입시더”라고 하곤 했다. 물론 시간 제약으로 실제 밤새도록 한 적은 없었다.

나훈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그의 풍모를 보여주는 단면이 지금도 회자되는 2008년 기자회견이다. 중견 가수가 젊은 여배우와 스캔들이 나서 일본 야쿠자에게 중요 부위를 훼손당했다는 루머가 부풀려지면서 결국 나훈아가 직접 나섰다.

   
1989년 젊은 나훈아의 모습. 사진=우먼센스 제공

나훈아는 기자회견을 열고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당시 그는 기자회견에서 웃통을 걷어 올리고 단상 위에 올라가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증명해주세요. 제가 지금 여기서 딱 5분간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으려는 행동을 보여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다. 참석자들의 만류로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돌발 행동에 루머는 진화됐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이 자주 초대받는 고위급 인사들의 연회에 단 한 번도 참석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2007년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가 저술한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에선 이건희 회장 등 삼성 일가가 개인적 파티에서 공연을 요청했을 때 유일하게 거부한 연예인이 나훈아였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의 파티에는 연예인, 클래식 연주자, 패션 모델들이 초청됐다. 가수의 경우,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2~3곡을 부르고 3000만 원쯤 받아간다. 나훈아는 삼성 측의 요청에 “나는 대중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고 당차게 거절했다 한다.

나훈아와 전남 목포 출신인 남진의 영호남 가수 라이벌 관계는 너무나 유명하다. 1970년대 두 사람은 잘생긴 외모와 가창력으로 가요계를 양분하며 원조 오빠 부대를 탄생시켰다.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너무나 고조돼 터진 사건도 있었다. 나훈아는 1972년 서울시민회관에서 공연하던 중 한 남자에게 병 파편으로 피습을 당해 왼쪽 얼굴을 70여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현재도 그 상처가 남아 있다. 언론 매체들이 용의자가 당시 라이벌이던 남진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고 몰고 가는 바람에 남진의 팬과 나훈아의 팬들이 크게 대립했고 심지어 양측이 패싸움을 벌인 일도 있다. 

나훈아는 간헐적인 콘서트외에는 방송출연 등의 연예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생활을 반복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활동은 팬들이 더욱 그를 찾게 하는 이유가 됐다. 대중가수에게 위험할 수도 있는 은둔 활동은 희소가치를 높여 나훈아의 공연에 관객을 몰려들게 하는 구심력이 됐다. 

그러나 2006년의 순회 콘서트가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됐다. 2007년 3월 예정된 단독 콘서트는 취소했다. 나훈아는 앞서 언급한 2008년 인터뷰 사건 이후로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나훈아는 세 번 가정을 이뤘다. 1973년 공군 입대 직전 배우 고은아의 사촌인 이숙희와 결혼했다가 전역을 1년 앞둔 1975년에 이혼했다. 

그 후 당대 최고의 미녀배우로 유명한 김지미와 1976년부터 1982년 초까지 6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당초 두 사람은 연예계 생활을 떠나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나훈아가 1981년 <대동강편지>를 들고 가수로 복귀하자 사이가 나빠지면서 결별하고 만다. 결별 당시 나훈아는 이 한마디를 남기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위자료로 김지미에게 줬다는 일화가 있다. 

“남자는 돈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 없으면 살 수 없다.” 

1983년 후배 가수였던 정수경 씨와 세 번째 가정을 꾸렸으나 정 씨가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심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훈아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다. 예전처럼 원기왕성한 무대를 기대하긴 어려우나 명절때 방송에 출연해 몇 곡이든 불러 무대를 휘어잡는 빛나는 그 모습을 다시 보여주기를 바란다.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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