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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변호인] '노동자 무료 상담 vs 방송사 무료 자문 거부' 선비와 상인의 경계에서

사회적 약자 위한 헌신과 경제적 안정 균형 찾기…무료변론을 위해서는 유료변론이 필요하다

2017.11.13(Mon) 17:20:53

[비즈한국] 변호사로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도 하고 싶고, 경제적 안정도 이루고 싶다. 둘 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기에 어느 하나 포기할 수가 없다. 아직은 그 균형점을 찾는 데 미숙하다. 두 바퀴가 같은 크기와 속도로 굴러야 하는데 여전히 울퉁불퉁 삐거덕거리며 나아가는 형국이다. 변호사의 노동 중 어떤 것이 ‘무료’인가에 대한 나와 상대의 관점이 다를 때 특히 더 그렇다. 이 기준을 잘만 세우면 좋은 뜻을 가진 청년 변호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변호사로서 사회적 헌신과 경제적 안정의 균형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진=영화 ‘변호인’ 스틸컷


안산 시화공단에 무료법률상담을 나간 적이 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데 처음엔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 했다. 체구도 자그맣고 앳된 외모였다. 24세 파견노동자였다. 19세 고3 때 처음 제조업 파견일을 시작해 몇 군데 공장을 다녔다고 한다. 회사에 돌려줘야할 돈이 있는데, 이 때문에 회사가 두 달째 임금 전액을 공제해 생활이 어렵고 마음이 슬프다고 한다. 

 

우리 근로기준법에는 임금전액불 원칙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임금은 노동자가 생활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므로 일단 임금은 전액을 지불해야 하고 빚을 이유로 함부로 공제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를 들은 그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노동부에 신고하나 사장한테 임금 밀린 것 달라고 직접 말하나 해고당하는 건 매한가지라고 했다. 그런 경우가 수도 없단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생업을 잠시 거두고 그 청년들을 돕고픈 마음이 들었다.

 

매달 둘째 주 수요일에 이 자리에서 무료상담이 늘 있다고 하니 소박하게 웃으면서 “매번 올 수 있겠네요. 수요일은 야간 잔업이 없으니까”라고 했다. 다음 달에 보자고 인사한 후 돌아 나가는 그의 가방에 노란리본이 흔들거린다. 

 

안산역 근처에는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뭐라 종알대면서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저 아이들이 내 눈에는 다 파견노동자로 보였다. 요즘은 택배, 퀵서비스, 대리운전, 요구르트 판매자 등 소위 ‘이동노동자’들의 쉼터에 무료법률상담을 나간다. 무료법률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행복하다. 이것은 ‘일’이라기보다는 ‘삶’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직업이 있고 돈을 벌어야 한다.

 

한번은 거대 규모 뉴스 방송사에서 프로젝트 자문의뢰가 왔다. 주말임에도 양해 없는 개인 휴대폰 연락은 차치하더라도 문제가 좀 있었다. 프로젝트 참여 및 자문은 무료로 해주어야 한다는 요구다. 공익, 인권, 빈곤계층 등 무료 위임계약 기준에 맞지 않고 귀 방송사 정도면 충분히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도 차고 넘치기 때문에 위 제안은 적절하지 않다고 정중히 답변했다. 

 

방송사의 담당자가 반문하기를, 청년일자리라는 사회문제에 대한 프로젝트인데 무료로 해줘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에, 나 역시 청년이고 벌이가 시원찮은데 귀사의 제안은 해당 프로젝트 주제도 배반하는 업무진행방식이므로 유감을 표하며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방송사는 왜 특별한 사정 없이 무료노동을 요구한 걸까.

 

우리는 저마다 자기 직군의 노동에 종사하며 살아가는데, 이념과 사상을 떠나 모든 사람들은 자기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공익 또는 인권을 지향하며 그러한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자기 직군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변호사도 노동자이거나 상행위 주체다. 

 

변호사에게 당연한 듯 무료노동을 기대하다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망하는 것은 여러모로 서로를 힘들게 한다. 우리 사회에 말 몇 마디, 글 몇 자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익숙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의 조력도 ‘선의’ 정도로 여겨 상담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변호사는 말 몇 마디, 글 몇 자를 위해 수년간 지식을 쌓아 자격을 얻었고 사는 동안 연구를 계속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말과 글이 자본이고 상품이다. 자문을 무료로 해주는 변호사도 있겠으나 지속가능한 운영방식은 아니다.

 

여기서 고민이 생긴다. 나는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변호사의 ‘사’자는 선비 사(士)다. 판사와 검사는 일 사(事)자를 쓴다. 변호사들은 선비와 같이 고매한 이상을 추구하고 도를 닦듯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작명취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변호사는 고용된 자인 경우 임금노동자이므로 사용자 또는 법인에 이윤을 창출해야 하고, 개인사업자인 경우에는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들의 급여 등 운영비용을 벌고 제 생활비도 구해야 하므로 더더욱 상인으로서의 명석한 행위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선비의 도리(道理)와 상인의 이재(理財)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는데, 안전망 없는 경쟁 일변도의 시장상황에 재야 변호사들은 진퇴유곡(進退維谷)에 처해있다. 꿈 많은 젊은 변호사들의 앓는 소리가 더 크다. ​ 

류하경 변호사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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