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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18] 권력사유화 파동의 전말

청와대의 사찰은 여당 의원에 대한 ‘길들이기’, ‘겁박’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2016.11.24(Thu) 16:53:46

# 청와대의 보복사찰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의 사찰 주체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박영준의 주도하에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실에서 사찰을 진행했던 것 같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했던 사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으나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실에서 했던 사찰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청와대의 사찰은 여당 의원에 대한 ‘길들이기’, ‘겁박’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2008년 3월, 국회의원 55인이 이상득의 총선 불출마를 촉구한 이른바 ‘55인 사건’ 이후부터 본격화했다. 이때부터 나에 대한 마타도어가 정가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온갖 음해가 난무하니 당시 나와 가까웠던 청와대 민정비서실 C 비서관이 내게 수시로 전화해 “이런 보고가 올라오는데 이게 뭡니까?”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정두언이 서대문에 있는 한 예식장을 재건축하는 업자로부터 5000만 원을 받았다.’ 내용이 너무 구체적으로 올라오니 민정비서관실에서 확인차 전화를 한 것이다.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은 나는 “​그런 예식장이 있다. 사장도 내가 잘 안다. 하지만 거기 재건축 아직 멀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하고 얘기한 뒤 혹시나 해서 현장에 가봤다. 

 

그랬더니 그 사이에 그 예식장은 철거되어 있었다. 나도 몰랐던 일이다. 그 예식장 사장이 평소 나를 팔고 다닌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와전되어 근거 없는 그런 소문이 나돌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 그것을 마치 사실인 양 청와대에 보고를 한 것이다. 대통령과 민정수석이 그것을 보면서 ‘정두언이 그렇구나’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박영준은 기획조정비서관으로서 비서관들을 총괄하면서 수석비서관 회의도 들어가고 비서관 회의도 주재했다. 그리고 자신과 가까운 TK(대구·경북) 출신 행정자치부 공무원 김명식을 인사비서관으로 앉혔다. 인사비서관실 행정관도 자기 사람을 갖다 앉혔다. 박영준과 가까운 행정관들이 “​정부에서 정두언과 가까운 자들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씨를 말리는 것은 좋은데 나한테 확인 좀 하라고 해라. 나하고 친하지도 않는데 친하다는 이유로 당하면 당사자는 얼마나 억울하겠냐”​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MB 정권 시절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 박영준과 가까운 행정관들은 “​정부에서 정두언과 가까운 자들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고. 사진=비즈한국DB


급기야 나와 가까운 박재성이 찾아왔다. 주간지 기자들하고 밥을 먹었는데, 청와대에서 나와 관련한 자료를 기자들에게 주었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나는 청와대 한 비서관의 입에서 내가 자주 다니는 술집 얘기가 나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는 ‘​이놈들이 나를 잡으려고 여기까지 뒤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조사를 하려면 접근을 해야 하고, 접근을 하다보면 들키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뚜렷한 게 안 나오니까 ‘찌라시’ 시장에 나에 관한 엉뚱한 자료를 흘려 음해를 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평소 인연이 있는 주간지, 월간지 기자들한테 자료를 주면서 취재해서 기사를 쓰라고 한 것이다. 청와대에서 나를 사찰하고 나에 대한 음해성 기사를 쓰라고 사주했다는 것은 심각한 얘기였다. 

 

분명하게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청와대에 있던 주간지 기자 출신의 한 후배를 불러 확인해보라고 했다. 2~3일 뒤 후배에게 연락이 왔는데 사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며 당시 이종찬 민정수석에게 항의했다. 이종찬도 박영준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를 사찰한 국정원 파견 청와대 직원 이 아무개는 이종찬과 김성호 국정원장이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까지 사찰했다. 이 아무개는 박영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종찬은 그럼에도 어쩌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 조선일보 인터뷰 사건 

 

그즈음 ‘조선일보’ 기자가 계속 만나자며, 인터뷰 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인터뷰는 힘들고 만나서 얘기나 하자고 했는데 내가 두세 번 펑크를 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 무렵 기자들과 술을 많이 먹었다. 하루는 낮에 MBC 기자들과 점심을 먹고 폭탄주를 많이 마셨다. 대낮에 2차까지 가며 폭음을 했다. 그날 조선일보 기자와 2시에 약속을 했는데 상황이 그리 되니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계속 전화가 오기에 나는 결국 ‘4시에 만나자’고 했다. 만취한 나는 조선일보 앞 한 카페에서 기자를 만났다. 나는 “정황을 얘기할 테니 정보보고나 해라”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명히 인터뷰는 안 된다. 맞지?” 다짐을 받은 상태였다. 술에 취한 나는 얘기하다보니 감정이 격해져 MB 정부의 권력사유화 실태에 대해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


※ 당시 조선일보 인터뷰 전문(2008.06.07 / Why B8면)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이명박의 복심(腹心)' 정두언 의원이 말하는 '100일간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기자는 지난달 19일 정두언(鄭斗彦) 한나라당 의원을 만났다. 그를 만나기까지 곡절이 있었다. 오후 2시로 잡혔던 약속이 두 차례 늦춰져 오후 5시에야 이뤄졌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정 의원은 "인터뷰는 곤란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녹음기 앞에서 그는 파문이 우려된다면서 이야기하고, 인터뷰는 곤란하다면서 다시 이야기했다.

 

기자가 정 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이다. 그때 그는 서울시 정무부시장이었다. 그는 이후 이명박(李明博) 당시 시장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뒤를 따랐다. 언론계는 그런 그를'이명박의 복심(腹心)'이라 불렀다. 별호처럼 그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때까지 핵심 역할을 하더니 얼마 전부터는 견제를 받아 밀려났다는 소문이 정가(政街)에 파다했다. 기자는 정 의원과 2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첫 질문은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으로 잡았다. "취임 후 100일간 청와대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정 의원의 답은 "이명박 정부는 당내 경선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대선(大選) 승리 후 국정을 수행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래도 인재 풀만 잘 가동했으면 준비가 없었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문제는 청와대의 일부 인사가 국정 수행에 집중한 게 아니라 전리품 챙기기에 골몰하면서 생겼습니다." 

 

■100일간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이 대통령이 '준비된 대통령'인 것처럼 말했는데 요즘 상황이 의욉니다.

"집권을 막상 해보니 여러 가지가 필요했어요. 그때 집중해서 잘해야 했는데 매뉴얼도 없고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 건 어느 정권이나 초기에 겪는 일 아닙니까.

"문제는 국정운영보다 전리품(戰利品) 챙기기에 신경 쓴 사람들도 나왔다는 데서 비롯됐죠."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죠.

"이런 비유를 해보죠. 한나라당이 막 고지(高地·대통령 선거)를 점령했어요. 고지를 점령한 뒤 몇 명이 자기 혼자 전리품(戰利品)을 독식(獨食)하려고 같이 전쟁에 참가했던 동료들을 발로 막 차서 고지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이 다 등 돌리고 떠나지 않겠어요."

 

―전리품이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거죠?

"현대에서의 전리품은 인사(人事)죠. 장·차관 자리, 공기업 임원 자리에 자기 사람을 심는 게 전리품이요, 이권(利權)이 되는 거죠."

 

―어떤 사람들이 그런 전리품 챙기기에 나섰나요.

"청와대의 세 명, 국회의원 한 명이 그랬다고 봅니다."

 

―그들이 왜 전리품 챙기기에 골몰했다고 봅니까.

"국정 수행을 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없으면 최소한 인품이라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자질이 없는 사람들은 보통 인사(人事)를 장악하려 합니다."

 

■청와대는 일부에게 장악됐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청와대의 A 수석을 예로 들어볼까요? 그는 민비(閔妃·명성황후)와 같은 존재입니다. 민비가 누구입니까. 흥선대원군이 세도(勢道)정치 없애겠다며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 앉혀놓은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됐어요. 대원군을 쫓아내고 또 다른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죠."

 

―정 의원이 대원군이란 말입니까?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A 수석이 2인자 노릇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대통령은 원래 그런 구도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에도 제가 추천한 인물은 절대 등용하지 않았어요. 2인자라는 말, 누구에게 힘이 실린다는 말을 대통령은 기업에 있을 때부터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A 씨를 쓴 거죠. 욕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안 거죠.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을 보면 대통령이 아직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B 비서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A 수석보다 더 문제 있는 사람이 B 씨입니다. 역대 정권의 실력자들을 보면 노태우 정부의 박철언(朴哲彦),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金賢哲),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朴智元), 노무현 정부의 안희정(安熙貞) 이광재(李光宰) 씨가 있었죠."

 

―굉장한 실력자라는 말이네요.

"B 비서관은 이 사람들을 다 합쳐놓은 것 같은 힘을 가졌다고 보면 됩니다. 그는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음해하고 모략하는 데 명수(名手)입니다.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그런 분야에서는 정말 '엑설런트'해요. 대통령의 말이라며 호가호위(狐假虎威)한 거죠. 누가 대통령이 진짜 그렇게 말했나 확인할 수 있겠어요. B 비서관을 대통령 주변에서 떼어놓으려 하면 C 비서관이 나섰어요."

 

―행정부 인사에 그렇게 간여했다면 국회의원 공천 때는 가만히 있었습니까.

"대통령이 절대 공천에서 떨어뜨리지 말라고 한 사람들까지 B 비서관이 작업해서 떨어뜨린 적도 있어요. 이방호 전 사무총장에게도 전화했다고 합니다."

 

―B 비서관을 천거한 게 정 의원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제가 바보 짓 한 거죠."

 

―그렇다면 B 비서관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데요.

"저만 없어지면 자기 세상이 된다고 생각했겠죠."

 

―아까 말한 국회의원 D 씨와 청와대의 A, B, C 씨가 관계있지 않습니까. 청와대의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국회의원 D 씨는 모르나요.

"관계있죠. 그런데 부작용을 지적하면서 '내 아들도 내 마음대로 못 하네'라는 답만 돌아와요. 그분은 부작용이 있어도 권력을 장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들이 '강부자 내각'을 만들었다

 

―대통령의 복심이라면 이런 사정을 왜 진언하지 않았습니까.

"했죠. 총선 전에 제가 청와대 들어가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어요. 대통령께서는 '내가 장관들에게 차관 인사까지 다 위임했다'고 자랑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어요. '대통령님, 실제로 그렇게 안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펄쩍 뛰시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무슨 소리냐고. 그러시는데 제가 뭐라고 더 이상 얘기하겠어요. 대통령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다는 뜻이겠죠."

 

―권부(權府)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몇몇이 대통령의 말도 어기고 자기들 '(인사)장사'를 한다는 얘기죠."

 

―이 정부 들어 계속 사람들이 지적하는'강부자' '고소영' 내각이 된 게 그 사람들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렇죠. 어느 고위 공직자는 제게 이렇게 접근하기도 했어요. 하도 밥 먹자고 졸라서 나가보니 '오빠, 나 이번에 안 시켜주면 울어버릴 거야~잉. 알았지~잉.' 이래요. 이런 사람을 A 비서관과 B 비서관이 합작해 고위직에 임명한 거예요."

 

정두언 의원은 최근 "청와대에 정무(政務)기능이 없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는 당시 그 보도가 나간 후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인터뷰'라는 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정무기능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언론에서는 청와대의 정무기능을 정무수석이 하는 걸로 오해하는데요, 실제 정무기능이라는 것은 청와대뿐 아니라 장관, 차관들도 모두 발휘해야 하는 겁니다. 독자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장관들이 인사권이 없는데 어떻게 정무기능을 수행하겠어요."

 

―그건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만일 문 부장이 기획취재부장인데 아랫사람 인사를 남이 다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일할 맛이 나겠어요? 남들이 문 부장을 부장으로 인정하겠습니까."

 

―차관 인사를 청와대의 몇 명이 다 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장관들이 차관이 어떤 인물이고, 그 밑에는 또 어떤 사람들인지 하나도 모르고 그냥 함께 일을 하는 거예요. 청와대 수석들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어느 부(部)는 총무과장 인사에까지 간여했어요. 이러니 일이 되겠어요? 장관들이 책임 있게 일하기는커녕 눈치만 보게 되죠."

 

■대통령은 그들의'발호(跋扈)'를 모르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에는 정 의원이 영향력이 있었을 때인데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인수위 일을 끝내고 내각 인선(人選)작업을 한 1주일 정도 해보니까 황당하더라고요. 너무 주먹구구식이고 우리끼리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인사라는 게 원래 어렵잖아요. 그래서 제가 '도저히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통령께 건의를 했어요. 위원회를 하나 더 만들어 더 많은 사람을 검증하고 크로스체크도 해보자고요. 그래서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제가 배제된 거죠."

 

―정 의원이 배제된 이유는 있습니까.

"제가 앞서 말한 국회의원 한 분이 한번은 저를 보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너는 왜 내가 추천한 사람은 안 쓰고 '빨갱이'만 데려다 쓰려느냐. 제가 다음 대통령 되려고 자기 사람 심는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대통령께도 그런 이야기가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대통령은 제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분이죠. 저러다 정두언이가 다치겠다 싶어 내각과 청와대 인선에서는 손을 떼고 당(黨)의 일만 맡으라고요."

 

―그 뒤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뒷전으로 빠지자 '공직자 중에 정두언과 관계있는 ×들은 뿌리를 뽑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아니, 세상에 왜 뿌리를 뽑습니까. 이러니 저뿐 아니라 대통령을 위해 뛴 주변 사람들이 너무 기분이 나빠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최대 피해자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대통령이죠. 모든 관심이 대통령에게서 사라졌으니까요. 몸도 떠나고 마음도 떠나버린 거죠."

 

―대통령은 사람들이 자꾸 떠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요.

"정확한 내용보다는 뭔가 본인한테 삐친 게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 의원이 이야기하는 몇 명을 왜 한나라당에서 견제하지 못하는 겁니까.

"지하철 타면 왜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들 어깨 툭 치고 지나가는 (건달 같은) 사람들 있잖아요. 쳐다보면 '야, 이 ××야!'라고 험상궂은 표정을 짓잖아요. 청와대 수석들이 그 몇 명에게 모두 그런 식으로 당하고 있는 거예요."

 

기자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정 의원은 수첩에서 메모 한 장을 꺼내더니 기자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찬 그 메모는 어느 장관이 자필로 쓴 기도문이었다. 내용은 '분하다, 억울하다,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중략) 너는 기억하라. 지금의 이 근본이 너에게 있음을 기억할지어다…." 정 의원은 이 장관의 실명(實名)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이상득 의원 불출마 시도했지만 실패"

 

대통령도 문제 심각성 인식…"형에게 전국구 말번(末番) 주면 어떻겠나" 말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렇게 당에 힘이 없는 겁니까.

"집권 초 '55인 사건'이란 게 있었잖아요. 그때 의원 55명이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세 가지 원칙 준수를 촉구한 게 바로 55인 사건입니다. 당시 조건은 첫째 세대교체를 위해 고령자 은퇴, 부정부패자 은퇴, 대선(大選) 과정에서 네거티브 운동을 한 사람을 은퇴시킨다는 거였어요. 다 실패했죠."

 

―세대교체란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李相得) 의원을 말하는 건가요?

"대통령도 그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어요. 대통령은 "형에게 전국구 말번(末番)을 주면 어떻겠느냐"고도 했어요. 그런데 55인 사건에 앞장섰던 이재오(李在五) 의원이 빠지면서 저희들만 이상하게 된 거죠. 그때 정말 '띠용~' 하는 황당한 기분이었어요."

 

―그 사건으로 대통령의 눈 밖에 났겠군요.

"왜 직접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하셨어요. 다음부터는 밖에다 대고 이야기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직접 하라고 했어요."

 

―국민은 그동안 청와대와 한나라당에서 일어나는 일이 친이(親李) 친박(親朴) 논쟁에 이재오파다, 이상득파다 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요.

"그걸 어떻게 국민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이재오 전 의원이 괜한 오해를 받은 건가요.

"그 양반이 성격이 나이브해서 다 뒤집어쓴 측면도 있죠."

 

―앞으로 현 정권 임기가 4년 9개월이 남았는데 이런 구경만 하다가 끝나야 하는 건가요?

"아니죠. 역대에도 그런 간신들은 다 기회가 되면 정리됐죠."

 

정두언 의원은 한번 입을 열자 쉴 새 없이 말했다. 녹음기가 앞에 놓인 것을 알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청와대의 몇몇 핵심들이 마구잡이로 자파(自派)세력을 키우다 보니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부산 인맥이 스며들어오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내막을 빨리 밝히는 게 이명박 정부가 더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길이 아니냐는 기자의 지적에 "나는 장기적으로 전도양양하고 그 사람들은 하느님이 (악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道具)로 쓴다"고 주장했다. 

 

 

■인터뷰 후기

정 의원과의 인터뷰가 끝난 직후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정 의원이 술에 취해 조선일보를 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다음 날에는 한나라당의 한 여성의원이 "인터뷰 내용이 뭐냐"고 탐문(探問)하더니 이윽고 정부의 한 기관에서도 "혹시 대통령을 욕한 것 아니냐"고 물어왔다. "인터뷰가 이번 주에 게재되느냐"는 질문도 잇따랐다.

 

인터뷰 당사자인 정 의원에게는 B 비서관이 전화를 걸어 "그동안 소원했던 일은 잊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정보수집력을 지닌 현 정부가 왜 다른 데서는 헛발질을 계속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꽤 지나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던 어느 날, 박재성이 찾아왔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내 인터뷰 기사를 보도한다는 얘기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 기자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러면 그렇지. 인터뷰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고 본인도 동의했는데” 하고 생각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6월 첫째 주 금요일에 저녁을 먹고 있던 내게 박재성이 다시 내일 토요일 아침 조선일보에 내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터뷰 안 한다고 했는데 기사를 쓰다니!” 어쨌든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조선일보로 달려 가보니 담당 기자는 사태를 짐작했는지 이미 잠적한 뒤였다. 정치부장은 자기 담당이 아니고 벌써 기사가 넘어갔다고 하고 편집국장은 난색을 표명했다. 기사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기사가 나왔다.

 

인터뷰 기사가 보도된 6월 7일, 나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날 점심 때 김용태 의원, 김원용 교수, 강만수 장관 등과 점심을 먹었다. “큰일 냈다”고 자책하며 점심 이후 집에 돌아와 혼자 깡소주를 마셨다. 아내도 해외출장 중이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얘기를 전해 듣고 걱정이 됐는지 저녁이 되니 정태근, 김용태, 박재성 등이 찾아왔다. 기자들도 몇 명 왔다. 거기서 그들에게 밤새 야단맞으면서 술을 먹고 새벽 3시인가 쓰러졌다. 

 

주말 내내 나는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공법, 정면돌파였다. 나는 6월 9일(월) 의원총회에서 “일부 인사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라며 내 입장을 공개적으로, 강하게 밝혔다. 돌이켜보면 만약 그때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그런 일이 생겼을 때 통상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사실이 잘못 전달됐느니, 언론에서 악의적으로 왜곡했느니 하며 변명을 했다면 내 정치생명은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때 정공법으로 고개를 들고 권력사유화라고 비판했기에 지금껏 살아남아 있는 게 아닐까. 

 

박형준을 오해한 MB는 나중에 “오해가 있었다”고 전화했다. 권력 주변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2010년 당시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왼쪽)과 이명박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조선일보 인터뷰 사건은 정태근이 MB를 만난 시기와 묘하게 겹쳤다. 정태근은 진작부터 MB에게 면담 신청을 해놓았는데 6월 6일 2시에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정태근은 다음 날 조선일보에 내 인터뷰가 실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상태였다. 정태근은 청와대에 들어가 MB와 2시간가량 얘기했다. 촛불 사태 관련 얘기에서 시작해 인사 문제까지 갔다. 거기서 1차로 MB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정태근이 “박형준과 같은 사람을 써야 합니다. 몇 년 같이 일해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했더니 MB가 “정 의원이 잘 몰라서 그런다”면서 대번에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박형준에 대한 비리를 몇 가지 얘기했다. 정태근이 들어보니 선거 때 상대 후보가 주장한 내용과 대동소이했다. 정태근은 “내가 알기로는 그것 때문에 상대 후보가 선거법 위반으로 조사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확인된 내용이 아니다”라고 박형준을 변호했다. 그런데도 MB는 계속 “네가 뭘 알아”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정태근은 “촛불 사태를 매듭지으려면 인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류우익 비서실장을 경질해야 하며 박영준, 장다사로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고 청와대를 나왔는데 바로 다음날 조선일보가 내 인터뷰를 보도한 것이다. 마치 나와 정태근이 짜고 공격한 꼴이 됐다. MB로서는 그런 오해를 할 만도 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MB와 면담을 마친 뒤 청와대를 나온 정태근은 김희중 대통령 부속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적어도 내가 판단할 때 MB가 박형준의 문제는 잘못 알고 있다. 내가 확인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 뒤 정태근은 당시 부산경찰청장에게 전화를 했다. 대선 때 MB 수행단장을 한 정태근은 그와 안면이 있었다. 정태근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부산청장은 “그렇지 않아도 진위를 가리기 위해 상대 후보를 소환했는데 출두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정태근은 “그 얘기를 대통령 부속실장에게 정확하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정태근은 김희중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한 얘기를 전달하고 연결까지 해주었다. 부산청장에게 다시 확인을 한 김희중은 MB에게 박형준과 관련한 상황을 보고했고, 나중에 박형준은 MB로부터 “오해가 있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권력 주변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 조선일보 인터뷰 사건의 후폭풍 : 청와대 개편

 

내가 조선일보와 인터뷰 한 보도가 나간 3일 뒤 박영준은 6월 9일 사의를 표명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정태근은 일본에 가기로 되어 있는 이상득을 만났다. 정태근은 이상득에게 류우익, 박영준, 장다사로 등 세 명을 권력 사유화와 관련해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상득은 박형준을 등용할 테니 장다사로는 봐주라는 태도를 취했다 한다. 결국 조선일보 인터뷰 사건은 박영준이 물러나고 대통령실장을 류우익에서 정정길로 개편하는 등 청와대 개편으로 이어졌다. 

 

역사는 이처럼 우연한 일들이 고리가 되어 발화하곤 한다. 사태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면서 나는 칩거했다. MB, 이상득과 충돌했으니 이후 나는 거의 모든 이들이 기피하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 사건 이후 칩거할 당시 유일하게 나를 두둔한 이는 정몽준이었다. 언론에 내가 진정성이 있다고 하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묻지 마식 인신공격이 걱정스럽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다음은 6월 13일 ‘노컷뉴스’ 보도 내용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인적쇄신을 둘러싼 당내 권력투쟁 양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13일 청와대에서 한나라당 안경률 의원을 만나 시국이 어렵고 엄중해 우리가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가야 할 텐데, 일부 의원의 묻지마 식 인신공격 행위와 발언들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고 안 의원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또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걱정을 끼쳐드리는 일은 자제해야 된다면서 ​국민의 바람은 한나라당이 민생경제를 살리는 것과 어려운 정국을 풀어가는 것인데 당내 문제로 힘을 소진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당내 갈등을 촉발시킨 정두언 의원 등 당내 소장개혁파에 대해 엄중 경고를 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소장개혁파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아온 이상득 의원은 외부 인사들과의 공식 면담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오는 17일 일본을 방문하는 등 당분간 정치 행보를 자제할 것으로 보여 당내 권력투쟁 양상도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K 의원은 TV에 나와서 “정두언 의원의 발언 내용은 국민들 삶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얘기다. 시의적절하지 않고 내용도 옳지 않다”고 말했다. 지역구에 있는 한 전통 시장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K 의원의 발언을 접한 나는 발끈해 즉시 전화했다. “형! 나하고 한판 붙자는 거야? 이길 자신 있어?” 그랬더니 그는 “내가 지지” 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K 의원은 55인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가 위원장으로 있던 사무실을 혁명군의 거사 사무실로 쓸 정도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최고위원에 출마하려면 이상득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니 나를 비판한 것이다. 나로서는 이래저래 참 힘든 시기였다.

 

그 과정에서 나와 정태근, 김용태, 박형준은 내 지역구에서 거의 매일 만나 술을 먹었다. 반면 이상득은 계속 전화를 돌리면서 소장파들을 진압했다. 결국 상황은 다시 무승부, 원점으로 돌아왔다. 소장파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직이라도 가지고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때는 정권 초였기에 모든 사람들이 이상득 등으로부터 인사에서 혜택을 받으려고 할 때였다. 사람들은 이상득의 권세가 정권 내내 끝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청와대는 개편을 했으나, 이상득은 건재했다. 이후 55인 선언의 핵심 인물인 나와 정태근, 남경필은 계속 사찰을 당했다. 이런 와중에 엉뚱한 사람도 사찰을 당했다. 부산의 이진복 의원 이었다. 그는 왜 사찰을 당했을까. 이 생각을 하면 나는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온다. 이진복은 O 씨와 지역구를 놓고 경쟁했다. O 씨는 박영준과 가까웠다. 이진복을 중도 탈락시키면 보궐선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찰을 한 것 같다. 권력을 사유화한 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볼 수 있는 한 사례였다. 

 

이진복이 공개적으로 그 얘기를 한 것은 사찰 파동이 일어난 2010년이다. 권력의 사찰은 참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나와 정태근처럼 한번 완전히 망가뜨리기 위해 사찰하기도 하고, 박형준처럼 MB 주변으로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진복처럼 일파들의 민원을 들어주기 위해 엉뚱한 사람을 조사하기도 했다. 다양한 목적으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사찰을 한 것이다. 게다가 인사나 이권 민원을 잘 안 들어주는 사람들도 사찰했다. 그야말로 권력을 개인 물건처럼 남용한 것이다. 

 

 

# 잠정적 휴전

 

얼마 뒤 나는 이춘식 의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상득이 후환을 없애려고 그랬는지 나를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싫다”고 했다. 이춘식 의원이 정태근을 만나, 넷이서 함께 만나자고 하니 정태근이 만나는 게 좋겠다고 했다. 2008년 7월 16일 저녁, 강남 메리어트호텔 지하 일식당이었다. 이날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다. 취기가 돌 때쯤 이상득에게 사찰 얘기를 꺼냈다. “박영준이 이런 짓까지 해서 내가 열 받은 건데, 말이 되느냐. 그리고 영준이는 청와대를 나갔지만 실제로 사찰을 한 자는 멀쩡하게 그대로 있다. 조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자가 청와대에 있어서야 되겠느냐. 목을 자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국정원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를 했다. 

 

내 얘기를 들은 이상득의 반응은 “그럼 어떻게 하지?” 하는 것이었다. 사찰을 기정사실화한 셈이다. 나와 정태근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의장님과 화해했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압박했다. 그러자 이상득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이춘식이 “제가 나서서 해결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날 이상득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은 MB가 서울시장 때부터 각종 인사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다고 변명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런데 나중에 술이 취하니까 자신이 류우익에게 얘기해서 박형준을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보냈다는 얘기를 대여섯 번이나 되풀이했다. 언제는 인사에 전혀 관여 안했다고 하더니, 본인이 박형준을 보냈다니, 앞뒤가 안 맞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당신들을 배려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내 말을 잘 들으라는 소리로 들렸다. 

 

이춘식이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사찰을 한 국정원 직원 이 아무개에 대한 조치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내가 채근을 하자 이춘식은 자신이 청와대 총무비서관인 김백준에게 얘기를 했는데 아무 조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김백준에게 전화했다. 김백준은 “이상득에게 확인을 해봤는데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상득의 보좌관을 불렀다. “이미 이렇게 하기로 했는데 김백준 수석을 통해서 확인해보니 이상득이 완전히 딴청을 부리는 것 같다. 좋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상득방에 들어가서 농성하겠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안 나올 테니 알아서 해라”고 큰소리를 냈다. ​ 

 

이러면 못 볼까? 3D 안경을 쓴 정태근, 정두언, 이상득 의원(왼쪽부터). 사진=뉴시스


그랬더니 며칠 뒤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2008년 9월 7일 청와대 옆 청운동쪽 별관 골목 이탈리안 식당에서 정정길 실장과 점심을 먹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정 실장은 알겠다고,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또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김성호 국정원장이 안국포럼 출신 의원들을 내곡동으로 초대했다. 정태근, 강승규, 권택기, 조해진 등이 갔다. 김 원장은 저녁을 먹기 전 나를 따로 만났다. 

 

김성호 : 국정원 직원이 정 의원을 괴롭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자초지종을 얘기해주세요.

정두언 : (이러이러하다고 사실 관계 설명)

김성호 : 그런 놈을 왜 제가 받아요, 잘라버려야죠.

정두언 : 글쎄요. 나는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지만 원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김 원장을 만난 얼마 뒤에도 아무 얘기가 없자 나는 다시 정정길 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아니 실장님, 저와 약속까지 해놓고 왜 아무 얘기가 없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하고 따졌다. 정정길은 “김성호 국정원장이 이 아무개가 국정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총리실로 보내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총리실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생긴 줄도 몰랐고, 윤리지원관실이 사찰 기능을 하는 줄도 몰랐던 나는 “이것은 또 뭐야”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건 청와대에서 옮긴다고 하니, “알겠습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도 이 일로 언제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김성호 원장은 이 아무개를 왜 자르지 않고 총리실로 보내느냐고 펄펄 뛰었다고 한다. 인사는 실무적으로 김주성 기조실장 소관인데 그가 그렇게 한 것이다. 결국 이 아무개는 그때 총리실로 자리를 옮겼다. 

정두언 전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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