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국내 대표 게임사 엔씨소프트의 노동조합(민주노총 산하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엔씨소프트 지회)이 출범 3개월을 맞았다. 지난 5월 노사 상견례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참석해 “모범사례를 만들자”라며 상생의 의지를 보이는 듯했지만, 당시의 훈풍이 무색하게 노조는 현재 임시 전임자와 사무실 협조라는 첫 단추부터 끼우지 못하고 있다.
엔씨소프트 노조 ‘우주정복’은 지난 4월 10일 공식적으로 출범했다(관련기사 대기발령, 오너 가족 경영…노조 출범으로 수면 위 떠오른 엔씨의 과제). 노조는 설립과 동시에 엔씨소프트 내 인사·고용 문제를 알렸다. 엔씨소프트는 프로젝트 해체 등으로 소속이 없어진 직원 중 일부를 ‘데브서포트팀(데브팀)’에 배치하는데, 데브팀에 간 직원은 신입처럼 구직하는 데다 퇴사 압박과 단순 노무 등의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 논란의 골자다. 더불어 노조는 불투명한 평가 기준, 임원진만 높은 수당을 받는 상후하박 구조, 군대식 조직 문화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노조는 본격적인 단체교섭에 앞서 5월 31일 사측과 상견례를 가졌다.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열린 노조-사측 상견례 자리에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사측 교섭 대표로 직접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김 대표는 이 자리에서 “프로그래머 출신으로서 노조 입장을 잘 대변할 수 있다”라며 “게임업계를 대표해 상생하는 노사 관계의 모범사례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김 대표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사측이 교섭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상견례 때의 분위기만큼 현재 교섭이 원활한지는 의문이다. 출범 3개월이 지나고 본교섭을 두 차례 진행하는 동안 사측은 노조 임시 전임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 사무실도 제공하지 않았다. 양측은 상견례 이후 6월 21일 1차 본교섭을 시작했다. 1차에 앞서 6월 7일 노조는 조합원의 의견을 정리한 108개 조항의 요구안을 사측에 전달했다. 요구안은 크게 △인사 △고용안정 △보상 △근로 시간 및 휴가 △근속 보상 △출산휴가 △작업환경 △복지 △조합 활동 등의 항목으로 구성됐다.
주요 사항으로는 인사 평가항목과 기준을 매년 1월 공개하는 것, 평가 결과에 따른 연봉·인센티브 지급에 대한 기준을 공개하는 것 등이 있다. 전환 배치가 필요한 경우 직원의 의사를 고려해 3개월 내 재배치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노조 창립일을 유급휴가로 정하거나 쟁의 기간에 중단한 업무는 외주로 줄 수 없다는 등의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요구도 담겼다.
1차와 2차 본교섭은 요구안에 대한 질의응답 위주로 진행됐다. 송가람 엔씨소프트 노조 지회장은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투명한 평가 기준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라며 “교섭 초반이지만 치열하게 협의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1·2차 본교섭에서 질의응답 외에 안건인 △노조 임시 사무실·전임자에 대한 협조 요청 △노조 측의 교섭 준비를 위한 시간 협조 요청은 모두 해결되지 않았다. 노조에 따르면 시간 협조 건은 노측이 필요한 시간을 제시하면 사측이 재검토하는 것으로 논의했지만, 임시 사무실·전임자 협조 건은 합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조 측에 따르면 사측은 임시 전임자를 인정하고 사무실을 제공하는 대신 노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했다. 결국 노조가 사측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임시 사무실·전임자 협조 안건은 결렬됐다.
노동조합 전임자란 무급으로 노조 업무를 전담하는 노조 임원을 뜻한다. 2021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을 개정하면서 법상에선 사라졌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쓰는 용어다. 사용자에게 급여를 받는 ‘근로시간 면제자’와는 다르다.
개정 노동조합법 제24조 1항은 ‘근로자는 단체협약으로 정하거나 사용자의 동의가 있는 경우 사용자 또는 노동조합으로부터 급여를 지급받으면서 근로계약 소정의 근로를 제공하지 아니하고 노동조합의 업무에 종사할 수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 노조 전임자에 관해 결정할 때 사측의 협조가 필요하다. 전임자의 수, 범위, 대우 등의 구체적인 사항은 주로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정한다.
하지만 노조 활동에는 전임자가 필수기 때문에,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전 교섭 과정에서 사측에서 임시 전임자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양측이 제대로 교섭에 임하기 위한 절차이자, 사측이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는 제스처인 셈이다. 현재 엔씨소프트 노조 임원진은 퇴근 후 또는 개인 시간을 쪼개 카페 등에서 교섭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사용자가 임시 전임자를 인정하지 않다는 건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주로 조직문화가 경직된 곳이나 지역의 영세 기업에서 생기는 일”이라며 “인정 여부는 사측이 얼마나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지, 노조에 대한 인식은 어떤지 등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게임업계 노조 관계자는 “회사가 ‘너네에게 내어줄 건 없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면 전임이나 사무실은 조건 없이 협조해야 한다”라며 “설령 사측이 노조를 반기지 않아도 구성원의 여론을 감안하면 빨리 인정하는 게 회사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엔씨소프트 노조의 상황은 2018년 9월 게임업계 최초 노조인 넥슨코리아 노조가 출범했을 때와 비슷하다. 넥슨코리아 노조는 사측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임시 전임자 2명의 근로시간 면제와 임시 사무실 제공을 요구했지만 넥슨코리아는 이를 거절했다. 당시 넥슨코리아는 노조 가입범위를 제한하는 조건을 걸었다. 사측과 공개적으로 갈등하던 넥슨코리아 노조는 교섭이 진행 중이던 2018년 12월에야 임시 사무실 및 전임자를 보장받았다.
넥슨코리아 노조의 뒤를 이어 출범한 스마일게이트 노조는 교섭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 없이 전임자, 사무실 등을 협조받았다. 반면 2021년 4월 게임업계에서 네 번째로 출범한 웹젠 노조는 전임을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영호 웹젠 노조 지회장은 “4월 설립 이후 인정까지 5개월 이상 걸렸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노조 활동한다고 ‘주경야노’라고 말했을 정도”라며 “제대로 된 사무실이 없는 상태로 거의 1년을 보냈다. 지금도 몇 가지 문제가 남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임시 전임자 인정 및 사무실 제공 여부 등을 묻는 질문에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교섭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다. 교섭에 성실히 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심지영 기자
jyshim@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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