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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백성 위해 일하려고 애쓴 이상주의자들”

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 ‘선비로서 큰 역할’ 강조

2014.04.09(Wed) 10:33:08

   
▲ 정옥자 서울대 명예 교수


일부 사회지도층과 지식인들의 일탈 행위가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사례가 끊이지 않으면서 ‘우리 사회에 선비 정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지난 4월4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의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이라는 강연이 개최돼 진정한 지도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게 했다. 강연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 있는 청정한 마음가짐…. 조선시대의 선비상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란 신분적으로는 양인(良人)이고 경제적으로는 농촌지역의 중소지주층 출신이 주류였다. 조선의 국학(國學)이던 성리학을 주전공으로 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학인이었다. 사(士)의 단계에서 수기(修己)하고, 대부(大夫)의 단계에서 치인(治人)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근본으로 삼아 학자관료인 사대부(士大夫)가 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았다. 자신을 연마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군선비의 전공필수는 문.사.철(文?史?哲)중심의 인문학이었다. 특히 철학에 해당하는 경학(經學)이야말로 학문의 핵심이었다. 수기(修己)에서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수신(修身)은 어린아이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소학(小學)>에 기초를 두었다. 나아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 성리학서를 학습하였는데, 성리학의 핵심교과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역경)이었다.

과거 시험 외면한 선비도 등용

선비의 진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선비가 선택하던 과거를 보는 것이다. 20세 전후에 자격시험인 소과(小科)시험을 보고 최종적으로는 대과인 문과(文科)에 합격해야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9품관부터 시작하는 학자관료가 되었다.

둘째, 산림(山林)의 길이다. 조선중기에 이르면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대학자를 산림이라 차별화해 우대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그 대표적 인물로서 청을 토벌하겠다는 북벌론(北伐論)을 제창해 국민의 단결을 도모했다.

셋째, 부득이한 선택으로 은일(隱逸)이 있다. 국가를 경영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초야에 은둔해 있던 선비를 말한다. 이들은 부덕하고 무도한 통치자가 권력을 휘두를 때 정치판에 나아가는 일을 거부했다.

   
넷째,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선택하는 ‘처변삼사(處變三事)’가 있다. 은둔·망명·자결이 그것인데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맞는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을 택했다. 의를 일으켜 세워 적을 쓸어버리겠다는 이 마지막 결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항쟁과 1895년 을미사변 때 국모가 시해되는 위기상황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들 수 있다.

“지조와 절개는 선비의 징표”

선비의 특징적인 면모는 일관주의(一貫主義)에서 잘 나타난다. 자신과 타인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박하되 남에게는 후하게 대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 일관성은 세력에 따라 표변하는 기회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조와 절개는 선비로서의 징표 같은 것이었다.

선비란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단단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인물상이며 영어의 젠틀 맨(gentle man)이 이에 해당될 듯싶다. 청빈을 미덕으로 삼아 검약(儉約)을 실천하는 청빈검약(淸貧儉約)의 생활철학을 가진 사람이 선비이다. 조선 선비에게 있어서 호화와 사치는 금기사항이며 국가사회의 공적(公敵)으로 치부될 정도였다.특히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그 배움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인식하는 학행일치(學行一致)를 중시했다.

나아가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부추겨주며(抑强扶弱),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하기(先公後私)를 실천하여 모든 구성원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이상사회, 즉 대동사회(大同社會:작은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볼 때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라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선비의 최종 지향점은 중용의 정신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조화와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중정(中正)의 상태, 바로 그것이다.

선비의 멋은 무엇보다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려는 학예일치(學藝一致)정신에서 빚어졌다. 선비는 시(詩)?서(書)?화(畵)를 교양필수로 하였기에 생활의 멋을 시나 그림, 글씨로 표현하며 운치 있는 삶을 꾸렸다.

특히 조선후기 선비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조국산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키웠다. 금수강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우리 산하와 강토를 유람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그렇게 하여 다져진 국토애를 표현하기 위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그렸다.

결론적으로 선비란 지식종사자에 불과한 오늘날의 지식인보다 확대된 역할을 하였다. 지식과 교양을 갖춘 인문학도로 학예를 겸수하여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지성인이었다. 앎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최선을 다하고, 배운 것을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에 실현시키려 노력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유배를 재충전의 기회로 활용

선비가 사대부 생활을 하다가 당하는 좌절은 유배와 낙향이다. 선비들은 이 좌절의 시기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다시 수기의 단계로 돌아가 관료 생활 중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학문연마에 골몰하고 유배지의 인재를 모아 양성하여 지방문화를 살찌우는 데 한 몫을 톡톡히했다.그리하여 종국에 가서는 그 제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자기학문을 완성하고 생활터전을 가꾸어 유유자적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선비의 지적 활동은 일생동안 활동한 업적과 지적 작업의 소산인 문집으로 총정리되어 마무리됨으로써 사후에 평가되었다. 자손에게는 영광이고 국가에는 인재의 선례로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이재명 기자

jaimi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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