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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의 '세상 읽기' ]

"도토리와 도롱뇽", 오만한 인간주의와 솔직한 인간주의

2015.01.12(Mon) 13:05:18

   
▲ 김재홍 시인

가을의 정취가 바야흐로 절정을 향하는 때 서오릉(경기도 고양시)을 찾았다. 세조의 원자 장(璋, 의경세자, 덕종으로 추존)이 누워 있는 경릉을 비롯해 예종의 창릉, 숙종의 명릉 등 다섯 기의 능과 순창원, 수경원 등 두 기의 원(園)에다 장희빈의 대빈묘까지 동구릉(경기도 구리시)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의 족분을 이루고 있는 사적(제198호)이다.

1457년부터 조성되어 거금 500년 이상 왕실과 국가의 관리를 받아 온 서오릉의 나무들은 높고 웅장했으며, 색색의 낙엽들은 난분분하며 아름다웠다. 평일 오후의 서오릉은 연로한 몇 쌍의 노부부와 여남은 명의 유치원생들을 소리와 색으로 대비시켰으며, 아주 가끔은 다람쥐가 나타났다 재빨리 사라졌고 청설모는 잠깐 두 눈을 깜박이다 달아났다.

무슨 일인지 투덜거리며 걸어 온 그 할머니는 여든네 살이라고 했다. 천으로 된 낡은 장바구니 같은 걸 가슴께로 맨 할머니의 손은 거친 먹빛 크로키 느낌이었고, 손톱 밑에는 흑갈색의 이물질이 끼어 있었다. “글쎄, 다람쥐 먹을 거라며 줍지도 말고, 주운 것도 다 내려놓고 당장 나가라 하지 뭡니까!”
할머니는 방금 관리인의 힐난을 받고 분한 마음을 추스르며 돌아 나오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몸에 익은 계절의 시계를 따라 도토리를 주우러 왔을 것이고, 그래도 숲이 온전한 서오릉을 찾았을 것이다. 제대로 허리를 펴서 걷지도 못 하는 할머니는 이 계절의 도토리를 모아 옛날처럼 모종의 특식을 준비하려 했을 것이다. 결국 할머니의 특식을 가로챈 것은 다람쥐였다.

< ㄱ >
‘선생님은 어디 사세요?’라는 만 원어치의 인사
오늘도 구부러진 육신은 덜컹덜컹 굴러 간다

-시집 『다큐멘터리의 눈』 중에서

 2003년 10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도롱뇽 소송’이란 게 있었다. 당시 양산 천성산 내원사 승려였던 지율(대한불교 조계종 비구니)과 그녀가 대표로 활동하던 ‘도롱뇽과 도롱뇽의 친구들’은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원효터널) 공사 착공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2006년 2월 대법원의 최종 기각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항고·재항고를 거치며 치열하게 전개된 소송이었다.

천성산을 관통하는 원효터널을 뚫고 나면 일대 생태계가 파괴돼 결국은 도롱뇽이 멸종 위기에 처할지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공사 착공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소송을 제기한 요지였다. 지율은 2003년 2월부터 2006년 1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300일이 넘게 단식을 감행했고, 공사는 2년 반 동안 계속 지연됐다.

2008년 7월 당시 박승환 한국환경공단 이사장은 2조 원이 넘는 국가계산이 낭비됐다고 했고, 2012년 12월 새누리당 논평에서는 무려 6조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였다고 했다. 지율 자신도 “3개월의 공사 중지와 3개월의 발파중지가 전부였으며 그 손실액은 51억 원”이라고 밝혔다(<오마이뉴스>, 2012. 12. 17). 경제적 손실 규모야 각각의 산출 근거를 모르니 뭐라고 할 말이 없지만, 어떻든 도롱뇽으로 인해 경부고속철도 공사는 상당 기간 지연됐고, 열차를 이용하려는 많은 승객들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최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천성산 화엄늪(해발 798m)에는 청정 환경의 지표종인 꼬리치레도롱뇽을 제외하고 보통 도롱뇽은 알과 유생, 난괴(卵塊, 알덩어리)가 빈번하게 관찰됐고, 생태계는 전반적으로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2014. 10. 29). 

도토리를 두고 온 팔순의 할머니는 모처럼의 특식을 잃어버렸고, 도롱뇽이 제기한 소송은 2년 반의 시간과 최소한 51억 원이라는 거금을 날리게 만들었다.

요사이 우리는 생태계 보호니 자연 보호니 하는 말을 자주 듣고 쓰며 살고 있다. 한 마디로 대단히 오만한 인간주의적 망발이 아닐 수 없다. 한낱 인간 존재가 생태계를 보호하고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가늠할 수 없이 깊고 거대한 우주의 한 터럭만큼도 되지 못 하는 인간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인 양 뭇 생명을 격리시켜 놓고, 그래 그 모두를 보호할 수 있다고? 마찬가지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할 수 있다고?

돌이켜 생각하면 근대 문명은 자본주의의 소산이며, 불평등과 소외의 체계인 자본주의는 마땅히 거부되고 부정되어야 하며, 일반적으로 생산·건설·제조·유통은 부정적 함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인간주의적인 이 눈앞의 문명을 긍정적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겨우 인간에게 이로운 다리를 놓고 집을 지으며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 마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보호하고, 파괴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필자 김재홍(金載弘) 시인은 2003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 '메히아'와 '다큐멘터리의 눈'을 발간했으며, 2011~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차세대예술인(AYAF)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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