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동안 갈고 닦은 장인정신과 그 제품에 열광하는 워너비들이 합쳐져서 훌륭한 명품이 탄생되는 것이다.명품의 탄생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비즈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들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루이비통의 탄생
루이 비통은 앙쉐의 한 작은 마을의 대대로 목공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나무를 다루는 일을 보며 자랐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갈 결심을 했다. 파리에서 그는 귀족들의 여행 짐을 꾸려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루이 비통은 의상들에 구김이 가지 않도록 짐을 잘 꾸렸고, 얼마 못가 나폴레옹 3세의 부인과 유제나 왕후의 총애를 받는 유명한 도제가 되었다.
철도시대가 개막되자, 루이비통은 반원형의 뚜껑으로 된 트렁크가 운반하기에 불편한 디자인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기차의 짐칸에 쉽게 올려놓을 수 있는 윗면이 판판한 플랫 트렁크를 선보인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사각트렁크의 기원이 된다.
이러한 사각 트렁크는 여러 개 겹쳐 운반하기도 매우 좋았다. 뿐만 아니라, 표면 소재도 알루미늄 또는 아연 덮개 처리된 밀폐 방수 캔버스를 사용해 습기와 곤충을 막는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여행을 떠나는 부유층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루이비통은 가방업계에 굉장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 루이비통은 5대에 걸쳐 진화를 거듭하루이비통의 성장
1859년,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는 아버지의 사업을 크게 발전시킨다. 루이비통의 화려한 성공탓에 이미테이션이 마구 쏟아졌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르주는 베이지와 갈색의 바둑판 무늬의 다미에 캔버스를 고안했고, 곧이어 세계 최초로 제품에 브랜드 로고를 프린팅한 모노그램이 탄생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동차가 보편화 되고, 여행문화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은 크고 무거운 트렁크 대신 작고 가벼운 가방을 원하게 된다. 1932년 한 샴페인 제조자가 자신의 소중한 샴페인 여러병을 담을 수 있는 넉넉한 백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조르주의 아들 가스통이 ‘노에’를 런칭하게 된다. 목 부분을 조일 수 있는 이 토트백은 이후 다양한 사이즈와 소재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 후 다양한 백들이 출시되기 시작하는데, 1978년 일본 매장 오픈을 시작으로 아시아 지역에도 진출하게 된다. 1985년에는 ‘에피’ 라인을 런칭하며 또 다시 크게 성공한다.
하지만 80년대를 지나면서 루이비통은 경영난에 허덕이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오랜 가족 경영으로 인해 트랜드를 따라가지 못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촌스러운 브랜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미국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통해 엄청나게 부자가 된 베르나르 아르도는 모엣 샹동과 헤네시, 크리스챤 디올을 인수한 뒤 루이비통도 인수하게 된다. 미국식 경영방식으로 한때 프랑스인들은 그를 비난했지1997년 마크 제이콥스를 디자이너로 영입해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 시작점이 젊은 층을 겨냥한 ‘베르니’ 라인이다. 에나멜을 입혀 반짝반짝하게 보이게 만들어 기존 루이비통과는 다르게 사뜻한 이미지를 선보이게 된다. 그 이후 일본인 아티스트 무라카미와의 콜라보를 통해 ‘멀티컬러’를 탄생시킴으로써 또 한번 전세계적으로 루이비통 열풍이 불게 된다. 2013년에는 ‘제피르’를 런칭하여 루이비통열풍은 계속될 전망이다.
루이비통이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 비결은 가죽이 두툼하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져 오랫동안 써도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루이 비통만의 스페셜 오더 서비스는 그대로 계승되어 현재에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으며, 모든 루이 비통 매장에서 요청할 수 있다. 고객의 상상과 욕구에 따른 다양한 형태와 기능의 제품이 루이 비통의 고유의 특징을 살리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주문이 가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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