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폭싹 속았수다’ 3막이 공개되고, 또 여지없이 광광 울었다. 원체부터 ‘폭싹 속았수다’는 환상의 작감배(작가, 감독, 배우) 조합으로 큰 기대를 모은 작품. 그러면서도 작년에 기대를 모았던 넷플릭스 작품들이 그 기대에 못 미친 적이 많았던 지라 일말의 불안도 없지 않았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3월 내내 매주 금요일마다 4회차씩 공개되는 16부작인데, 3월 28일 공개 예정인 마지막을 보지 않고도 이미 ‘인생 드라마’라 칭송하는 소리가 높다.

드라마는 제주에서 태어난 ‘요망진(‘야무지다’의 제주 방언) 반항아’ 오애순(아이유, 문소리)이 ‘팔불출 무쇠’ 양관식(박보검, 박해준)와 함께 살아내는 일생을 사계절로 풀어낸다. 오애순은 1951년생, 양관식은 1950년생으로 2025년 지금은 70대 중반 노인으로 우리네 엄마아빠 혹은 우리네 할머니할아버지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척박했지만 그림 같은 순간들이 존재했던 부모와 자식의 인생을 톺아본다.

1~4화의 1막이 애순과 관식의 봄 같은 어린 시절에서 부모가 되는 여름의 진입까지 다루고, 5~8화의 2막은 부모가 된 그들의 애환과 하고 싶은 것 많은 장녀 금명(아이유)의 이야기를, 9~12화의 3막은 결혼을 준비하는 금명을 둘러싼 에피소드와 대들보 금명과 달리 부모의 걱정을 사던 장남 은명(강유석)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모와 자식세대의 이야기를 흐름에 따라 그려나가는 와중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그때는 몰랐던 부모의 마음, 마음만 앞서고 철은 없었던 그때 자식의 마음을 얽어가며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주요 서사는 애순과 관식, 그리고 금명을 따라가지만 ‘폭싹 속았수다’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서사가 알알이 마음에 박히는 드라마다. 특히 세상 모든 엄마들이 등장해 눈물을 뺀다. 곳곳에 등장해 강력한 울림을 주는 애순이 엄마 전광례(염혜란)는 광례-애순-금명으로 이어지는 모녀 3대의 서막을 알리는 주인공. 여기에 자식 잃은 아픔으로 한평생 애순에게 “고달프냐” 묻는 애순의 할머니 김춘옥(나문희), 애순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켰지만 자식 잃은 애순을 묵묵히 위로할 줄 알던 관식이 엄마 권계옥(오민애), 툭하면 바람 피우며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두고도 전처 자식들을 정성스레 뒷바라지한 부상길(최대훈)의 아내 박영란(채서안, 장혜진), 암표상으로 착각 받으면서도 아들이 그린 영화 간판을 은근히 자랑하고 홍보하는 박충섭(김선호)의 엄마(이지현) 등등. 무례하고 못된 시어머니의 전형이자 자식의 가슴에 돌을 올려두는 박영범(이준영)의 엄마 윤부용(강명주)마저 안쓰러운 구석이 있다. 아들에게 “너는 내 프라이드야. 걸작이야”라고 말하는 모성은 얼마나 비뚤어졌고 또 동시에 얼마나 서글픈가.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따스하고 구수한지를 보여주는 인물 면면도 이 드라마를 보게 만드는 힘. 동료 잠녀(해녀) 광례의 딸 애순을 평생 딸처럼, 조카처럼 돌봐준 충수(차미경), 최양임(이수미), 홍경자(백지원) 해녀 이모 삼인방은 물론이요, 남편 염병철(오정세)과 전처 자식들을 돌본 애순에게 ‘도희정 장학금’을 건넨 나민옥(엄지원), 귀찮음을 무릅쓰고 애순과 관식의 가난과 자존심을 도와주고 지켜줬던 도동리 만물센타 주인 하르방(박병호)과 할망(송광자), 어린 애순에게 조기 먹이는 걸 아까워한 야박한 성품이지만 그래도 평생 어머니를 모시며 애순 아버지의 제사를 정성스레 지냈던 애순의 작은아버지 오한무(정해균) 내외 등등 누구 하나 허투루 넘어갈 수가 없다. 이 인물들을 생생히 구현한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은 입이 부르트게 찬사를 던져도 모자라고. 심지어 에피소드 하나에 짧게 등장하는 특별출연들도 존재감이 어마무시하다. 부산 여관방 주인(강말금), 금은방 주인(신미영), 땐스를 추던 복덕방 사장(이미도), 졸부 출신 제니 엄마(김금순), 혀짧은 은명 담임(박재윤), 깐느극장 사장(김해곤)···.

‘폭싹 속았수다’는 근래 숱한 도파민 넘치는 드라마와는 백만 광년은 떨어져 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사계절로 표현하며 부모자식 관계를 그리지만, 보고 있자면 이 각박하고 풍진 세상에도 ‘착한 끝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요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 요즘 세상에 ‘착하다’는 말은 ‘어수룩하다, 세상물정 모른다’를 넘어 ‘만만하다’로까지 비약되는 지경인데,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착한 끝은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희망을 던진다. 그 착한 끝이 물질적인 성공이나 남들이 알아주는 무엇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도 같이 보여준다. 왜 그렇게 가난하게, 힘들게 살았냐며 엄마에게 투정하는 금명에게 애순이 “엄마 인생도 나름 쨍쨍했어. 그림 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다고”라고 말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임상춘 작가의 주옥 같은 대사와 내레이션이 콕콕 박히는데, 벌써부터 명대사를 필사하는 이들이 많고 SNS에도 대본집 요청이 폭주하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짧고 굵게 다가온 한마디는 중년의 애순이 충수 이모에게 “나는 언제 다 커요?”라고 묻자 충수 이모가 답한 “나도 아직 들 컸쪄.” 벌써부터 인생 다 산 중늙은이마냥 퍼져 있는 내게 경종을 울리기 충분했다. 아, 나 아직 크려면 한참 멀었지. ‘다른 사람을 대할 땐 연애편지 쓰듯 하면서도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겐 낙서장 대하듯 했다’는 내레이션은 또 얼마나 뜨끔한지. 여전히 본가에 들리면 뭐라도 하나 먹이려고 하고 자식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는 자신의 모습이 스쳐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란 뜻의 제주 방언인 제목 ‘폭싹 속았수다’는 이 드라마 내용을 잘 함축하고 있다. 혹은 광례가 어린 애순에게 당부하던 말 ‘살민 살아진다(살면 살아진다)’로도 읽을 수 있다. 영어 제목 역시 마찬가지. 미국 철학자 엘버트 허버드의 명언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인생이 너에게 레몬을 줄 때,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에서 착안한 영어 제목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는 인생에서 역경과 고난을 마주해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헤쳐 나가라는 의미를 잘 표현한다.
인생은 얼마나 길고도 짧은가. 얼마나 애달프고도 찬란한가. 그 안에서 얽히고설키는 인연들은 또 얼마나 성글고도 질긴가. 드라마 보면서 이런 오만가지 감정을 반추하게 만드는 경험은 쉽지 않다. ‘폭싹 속았수다’의 마지막 4막을 기다리면서 이 드라마가 끝내 끝나버린다는 것에 조바심이 나는 이유다. 몰아서 보기 위해 아끼고 있는 사람들은 휴지를 꼭 챙겨둘 것. 괜히 유한킴벌리가 드라마와 협업해 ‘크리넥스 보습 에센스 로션’ 티슈를 한정 출시한 게 아니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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