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솔직히, 넷플릭스 시리즈 ‘제로 데이’를 평온한 심정으로 시청하기는 좀 어렵다. 적어도 몇 달 전만 해도 ‘제로 데이’를 보며 ‘오, 드라마틱하군’ 생각했을 텐데, 알다시피 몇 시간짜리 계엄을 겪은 이후 한국인은 이런 콘텐츠를 보면서 ‘오, 리얼하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으니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이버 테러로 단 1분간 미국 전역의 전력과 통신이 끊어진다. 그 1분의 테러로 모든 시스템이 마비되며 3402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전국민에게 전달되는 메시지. “This will happen again(이 일은 또 일어날 것이다).” 누가, 왜, 어떤 의도로 이런 사이버 테러를 감행했는지 알 수 없으니 사회는 불안과 혼돈에 휩싸인다. 그리하여 현직 대통령 에블린 미첼(안젤라 바셋)은 이 사태의 진상 규명을 위해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한 ‘제로 데이 위원회’를 만들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전직 대통령이자 유능한 검사 출신인 조지 멀린(로버트 드 니로)에게 위원회의 수장을 부탁한다.
‘제로 데이’는 전직 대통령 멀린이 사이버 테러의 배후를 밝히면서 거대한 거짓과 음모와 마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엔 모두가 러시아를 지목했지만,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고 판명된다. 누가 테러를 가했는지, 어떤 목적으로 그랬는지도 궁금하고 중요한 포인트지만, 그보다 먼저 흥미로운 건 진상을 밝히는 임무를 맡게 된 이가 현직 대통령이 아닌 전직 대통령 멀린이란 점이다. 미첼 대통령이 멀린을 택한 건 영리한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진상 규명을 해야 하지만, 영장 없이 누구든 체포할 수 있는 초헌법적 권한을 휘두르는 ‘제로 데이 위원회’는 부담스러운 것. 이를테면 독이 든 성배 같은 것이랄까.
재임 시에도 초당적 지지를 받았고, 재선을 포기하고 은퇴한 현재도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 멀린은 이 독이 든 성배를 고심 끝에 받아들인다. 처음 멀린은 위원회가 지닌 초헌법적 권한을 남용하지 않으려 하지만 정부의 압박으로 시간에 쫓기고, 멀린에 적대적인 유명 정치 토크쇼 진행자 에반 그린(댄 스티븐슨)의 선동에 흔들리며 점차 권한을 행사하며 무리한 수사를 감행하게 된다. 여론은 단 며칠 만에 급변하여 멀린은 평범한 시민의 일상을 옥죄는 파시스트로 몰린다. 국회에서 ‘제로 데이 위원회’의 권한을 견제하는 감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장으로 멀린의 딸인 하원의원 알렉산드라 멀린(리지 카플란)을 앉혀 놓은 것도 멀린의 목을 죄는 것 중 하나다.

게다가 멀린을 괴롭히는 건 외부에만 있지 않다. 남들은 모르지만 멀린은 환청이 들리고 환각이 보이는 등 일종의 치매 증상을 겪고 있는 중이다. 과거 아들이 마약 복용으로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으로도 보이는데, 아들이 떠날 때 틀어놓았던 섹스피스톨즈의 ‘누가 밤비를 죽였나’라는 노래 가사를 수시로 떠올리는 것도 그 때문인 듯. 드라마는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내내 환청과 환각을 겪는 멀린의 모습을 보여주며 과연 그가 제대로 진실을 캐낼 수 있을지 긴장감 있게 표현하고자 한다.

사실 6부작인 ‘제로 데이’는 서사가 탄탄하고 쫄깃한 편은 아니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여러 요소들이 애매한 맥거핀에 그치는 것도 김이 새고, 초반에 정돈되지 않은 서사 흐름으로 진입장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게 만드는 힘은 로버트 드 니로라는 명배우의 몰입감 넘치는 연기 그리고 드라마와 비교해 보게 되는 엉망진창 현실 때문일 거다. 초헌법적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올바른 권력에 대한 잘못된 신념 내지는 우국충정은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여론이란 얼마나 쉽게 선동되는지, 전문가도 속을 만큼 진일보한 딥페이크 기술 및 휴대폰 어플로 광범위하게 국민을 휘두를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위험성 등등 곱씹을 거리가 많은 것도 이 드라마가 지닌 힘.

드라마 결말에 이르러, 사이버 테러가 분열된 국가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한 경고성으로 자행됐다는 사실이 밝혀짐에도 여러 정치적 계산으로 진실을 묻어버리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에도 환멸이 난다. 결국 멀린이 진실의 폭탄을 터뜨리지만, 그 이후의 상황이 정의롭게 법대로 처리될지도 사실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가 환장의 콜라보를 보여주고 있는 미국은 물론, ‘설령 계엄이 헌법 또는 법률 위반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의회 독재의 심각성을 고려해 탄핵 기각 결정을 해달라’고 국회의원들이 헌법재판소에 탄원서를 내는 지경의 대한민국도 ‘제로 데이’의 뒷이야기를 섣불리 단언하지 못할 상황이니까.

누가 밤비를 죽였나? 아니, 누가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나? 결국 ‘제로 데이’가 던지는 질문의 요지는 이것이다. 정치 뉴스를 보고 있자니 환멸을 넘어 절망스러운 사람들이 많을 테다. 보다가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면 차라리 ‘제로 데이’를 보자. 거긴 로버트 드 니로의 명연기라도 감상할 수 있거든. 유능한 검사 출신이었는데 대통령 재임은 물론 은퇴 후에도 지지를 받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판타지도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