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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원경' 21세기 원경왕후 멋지게 표현한 차주영에게 찬사를

'왕' 중심의 사극 벗어던지고 여성 관점으로 재해석…실제 사건 중심에 창작 더한 '퓨전 사극'

2025.02.07(Fri) 17:34:35

[비즈한국] ‘원경’이 종영을 앞둔 이때, 나는 이제야 내 마음 속 원경왕후인 최명길을 놓아주는 중이다. 20세기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원경왕후로 분한 최명길의 후덜덜한 포스는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다. 그 때문일까, 그 이후로 최명길을 잊게 만들 만한 원경왕후는 쉬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엔 원경왕후를 주인공으로 주목하게 된 시대의 변화에 큰 이유가 있다. 

 

즉위식 이후 태종과 함께 춤사위를 벌이거나 19금 관계 묘사를 보여준 파격적인 드라마 ‘원경’. 그러나 티빙 드라마 ‘우씨왕후’와 달리 자극적인 묘사로만 소모되지 않고 새로운 원경왕후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사진=tvN, TVING 제공

 

눈에 띄는 인물들이 수두룩했던 여말선초(고려 말~조선 초). 이성계-이방원 부자와 이후 조선 최고 성군이 되는 세종까지 3대에 걸친 왕 라인은 물론, 신하 라인에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던 최영 장군부터 고려 마지막 충신 정몽주, 조선의 틀을 다진 개국공신 정도전 등 ‘먼치킨’급 인물들이 빼곡히 포진해 있었다. 태종 이방원의 아내 원경왕후 역시 남편을 도와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이자 여장부로 알려져 있지만 워낙 강력한 캐릭터가 많은 시대였던지라 원톱으로 조명되긴 어려웠다. 게다가 한 나라의 건국에 있어 중심은 왕일 수밖에 없으니까. 

 

‘킬방원’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거침없는 남성으로 묘사됐던 태종 이방원 또한 ‘원경’에서 복잡다단한 심리를 지닌 인물로 새롭게 묘사된다. 잘난 아내와 잘난 처가에 대한 묘한 자격지심이 있는 이방원은 ‘원경’의 흥미로운 포인트이자 서사의 핵심 줄기가 된다. 사진=tvN, TVING 제공

 

그간 여말선초 시기를 다룬 드라마가 많았던 만큼 여러 배우들이 자신만의 원경왕후를 보여주고자 고군분투했다. 자신의 가문의 앞날을 먼저 생각하는 젊은 원경왕후를 보여준 ‘육룡이 나르샤’의 공승연이나 조선의 공동 창업자임을 확실히 주장하는 강단 있는 원경왕후를 연기한 ‘태종 이방원’의 박진희도 기억에 남긴 한다. 그러나 ‘원경’은 원경왕후를 주인공으로 보는 것과 주요 인물로 보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확연한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주요 인물로 원경왕후를 바라봤을 때 우리는 원경왕후가 남편에게 바친 헌신과 노력이 ‘어떻게’ 배신당하는지 주목했다. 주요 인물일 때의 원경왕후의 목표는 남편의 그것과 동일하게 그려졌다. ‘원경’에서 주인공이 된 원경왕후(차주영)는 그가 ‘왜’ 이방원(이현욱)을 남편으로 맞아 믿고 따랐는지, ‘왜’ 남편을 도와 함께 조선이란 나라를 만드는데 뛰어들었는지 등 이유에 집중한다. 이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단순히 남편의 욕망에 동조하여 행동하는 게 아니라 시작부터 자신이 품은 대의와 소명(召命)이 있어 행동하는 인물이기에 원경왕후란 인물의 해석은 물론 창조의 영역도 넓어진다. 

 

사가에 있던 시절 이방원과 사이에 아들까지 낳은 몸종 출신 영실과 즉위 이후 후궁이 된 원경왕후 몸종 출신의 채령. 굳이 아내와 가까이 있던 미천한 출신의 여인을 취한 이방원의 속내에 원경왕후는 더욱 상처받는다. 사진=tvN, TVING 제공

 

티빙에서 2부작 프리퀄로 선보인 ‘원경: 단오의 인연’을 보면 이는 더욱 확실해진다. ‘단오의 인연’은 원경왕후가 아버지 민제의 제자였던 이방원과 인연을 맺게 되는 젊은 시절을 그리는데, 이때 이방원을 만나기 전부터 기개가 남달랐던 원경왕후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자신의 동무를 비롯해 고려의 처녀들이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고 따지고 행동하는 고려 여인이라니. 막연하게 유교적인 조선인의 사고로 원경왕후를 그저 ‘여장부’로만 습득했던 게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있다. 

 

관점을 달리 하니 원경왕후의 운신의 폭도 달라진다. 왕이 된 남편이 연이어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고 들이는 모습을 대하는 원경왕후의 모습은 기존에 분기탱천하던 원경왕후의 모습과 조금 다르다. 사가에 있던 시절 영실(이시아)에게서 자식을 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지만, 그에 대해 남편에게 강렬히 항의할 때는 남편이 내명부 수장인 자신을 제치고 마음대로 영실을 궁궐에 들였을 때다. “용상에서 내려오시지요. 저와 눈높이를 맞추어 얘기했으면 합니다. 이건 부부 간의 일입니다”라고 말할 때의 그 포스란. 

 

함께 노력하여 얻은 권력. 그러나 남편은 이제 자신더러 신하라 하고, 아내는 우리는 부부 사이이니 동등하다 말한다. 이런 관계가 평화로울 리 없다. 사진=tvN, TVING 제공

 

생각해보면, 남편 몰래 무기를 확보하고 주저하는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출전을 독려했던 원경왕후가, 중년의 나이에 왕비가 되어 남편의 후궁 문제에 질투로만 일관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실록에 기록된 바가 있고, 여자의 질투보다는 동등한 관계였던 부부 관계에 대한 배신감이 컸을 것으로 사료되지만, 원경왕후의 심리와 원경왕후를 배신하는 태종의 심리를 단순히 남녀관계의 ‘배신-질투’로만 묘사하기엔 납작한 면이 있다. ‘원경’의 흥미로운 지점은 원경왕후를 배신하고 여자들을 들이는 태종의 복잡다단한 심리와 태종의 축첩을 대하는 원경왕후의 심리를 보다 풍성하게 해석하고 그려내는 데 있다. 원경왕후의 몸종 출신 후궁 채령(이이담)을 뒷날 궁궐에서 내쫓는 것도 질투 때문이 아니라, 채령이 인사 문제에 개입했다는 사실 때문으로 그릴 정도로 ‘원경’은 질투 때문에 왕후의 품격을 해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관계는 신기한 구석이 많았다. 즉위 후 후궁 문제 등으로 왕과 왕비 사이가 좋지 못하다 했지만 정선공주와 성녕대군을 연이어 출산한 데 이어 (남동생 민무구·민무질의 사사 이후인) 1412년, 40대 후반의 나이로 자녀를 출산(요절)했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애증의 관계였다. 사진=tvN, TVING 제공

 

이런 흥미로운 해석은 원경왕후의 친정을 도륙내는 태종과 그를 대하는 원경왕후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태종이 왕권 강화 측면에서 권신이자 외척인 원경왕후의 친정인 민씨 집안을 도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남편이 네 명의 남동생을 죽일 때마다 분노하고 오열하다 뒤로 넘어가는 원경왕후의 모습 또한 그간의 사극으로 익숙한 모습이다. ‘원경’의 원경왕후 또한 남동생들의 유배와 죽음으로 충격 받고 어머니를 위로하며 함께 억장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그러나 원경이 더 뜨겁게 분노했을 때는 자신의 조력자인 정보원 판수(송재룡)를 태종이 살해했을 때다. 

 

검술로 심신을 수련하는 원경왕후의 모습. 성리학 기반의 유교 국가 조선의 왕비가 되었지만, 보다 여성의 지위가 좋았던 고려 여인으로 태어나고 자란 원경왕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판수는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원경왕후의 가까운 측근이자 사리사욕없이 진심으로 원경왕후를 돕는 백성으로 묘사되는데, 권력과 재물에 욕심을 내며 화를 자초한 면이 있는 남동생들의 유배보다 판수의 죽음에 더 강렬히 분노하는 것처럼 묘사한 것에도 원경왕후란 인물의 재해석이 깃들어 있다. 구휼미를 받지 못한 백성들이 원경왕후의 도움을 받으며 왕 대신 “중전마마”를 연호하며 찬사를 바치는 장면은 왕이 될 기개가 넘쳤던 원경왕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물론 ‘원경’은 실제 사건을 중심으로 하되 창작 부분이 많은 퓨전 사극이다. 원경왕후를 주인공으로 하려다 보니 무리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남성 중심으로 흘러갔던 그 시대의 여장부를 소환해 21세기 식으로 해석한 것이 꽤나 신선하지 않나. 여성 서사가 대세인 요즘 트렌드에도 부합한다. 고려 여인으로 태어나 남편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으나 조선 여인으로 죽고 기록됐던 원경왕후를 새롭게 생각해 본다는 면에서 ‘원경’은 꽤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그리고 차주영. 이후 다른 원경왕후가 나온다 해도 마치 최명길이 그랬듯, 21세기 원경왕후는 차주영으로 기억될 것 같다. 

 

티빙 오리지널이자 tvN에서 방영한 ‘원경’은 1~6화는 티빙에서 ‘19금’ 버전을 공개하는가 하면 프리퀄인 ‘원경: 단오의 인연’을 공개하며 다양한 시청자 타깃을 공략했다. 사진=tvN, TVING 제공


12부작 ‘원경’은 오는 2월 10, 11일에 남은 2화분을 방영하며 끝난다. 10화에서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에게서 군왕의 자질을 발견했으니, 폐세자 되는 양녕대군과 왕이 되는 충녕대군을 그가 어떤 식으로 대할 것이며 세상을 뜨기 전 남편과 어떤 식으로 마무리할 것인지가 남은 셈이다. 아직 ‘원경’을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시청을 권한다. 프리퀄 ‘원경: 단오의 인연’도 함께 볼 것.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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