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국가첨단산업 지원 법안 ‘반도체 특별법’을 두고 정치권과 노동계에서 치열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쟁점은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다. 이 법에는 첨단산업의 연구개발 업무에 한해 주 52시간제 원칙을 예외로 하는 내용이 담겼다. 새해 들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반도체 특별법의 빠른 처리를 거듭 강조했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최근 전향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야 합의를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개별법을 통해 근로 유연성을 보장한다는 것에 우려가 상당하다. 특례 적용 기준과 대상, 건강보호조처가 모두 대통령령으로 위임돼 주 52시간 상한제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반도체 특별법의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을 두고 여야가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청주캠퍼스 정문. 사진=SK하이닉스 제공](/upload/bk/article/202502/thumb/29035-71117-sampleM.png)
#미국·일본, 고소득 연구직 근로시간 예외 적용한다는데…
최근 산업계 최대 현안으로 꼽히는 이 법안은 반도체 산업 종사자의 주 52시간 적용 예외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여야 모두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강조하고 있지만 간극은 크다. 여당은 근로시간 연장 안을 ‘핵심 조항’으로 보는 반면, 야당은 ‘독소조항’으로 판단하며 거부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지난해 말 당론으로 발의한 반도체 특별법(이철규 의원 대표발의)에는 ‘화이트칼라 면제(white-collar exemption)’ 관련 조항이 들어가 있다. 전문직이나 고소득 연구개발 인력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제도로, 특별연장근로만으로는 글로벌 반도체 업체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삼성전자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 제도는 미국과 일본 등이 시행 중이다.
미국은 연간 소득 10만 달러(1억 4000만 원) 이상 고소득 근로자의 경우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을 넘겨도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일본은 일부 직무에서 연간 1075만 엔(1억 200만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근로자에게 주 40시간 기준과 초과근로수당 등의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대만도 우리와 비슷한 근로시간 제도를 운영하지만, TSMC에는 주 70시간의 강도 높은 근로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산업 특성상 고객사 일정 등에 따라 업무량의 변동 폭이 크다. 연봉 수준과 일의 성격도 다르다. 집중근무가 반복되는 구조여서 현행 제도(주 52시간 근무제)로는 (그들과 경쟁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근로시간 예외 적용 시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NRD-K 전경. 사진=삼성전자 제공](/upload/bk/article/202502/thumb/29035-71119-sampleM.jpg)
#근로시간 원칙 ‘훼손’ 부담에 부실한 기준까지 ‘우려’
하지만 근로시간 원칙을 손대는 조치인 만큼 반발의 목소리도 높다. 법안 세부 조항을 보면 특례 조항의 적용 범위와 근로자 보호 의무가 불분명하다. 구체적인 내용을 대통령령에 위임해 자칫 브레이크 없이 시행될 수 있다는 우려다. 제 34조 1항은 ‘근로시간 등에 대한 특례’는 당사자 간 서면합의로 근로시간, 휴게 시간과 휴일, 연장·야간 및 휴일 근로에 관해 별도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2항에서 근로 기준 적용과 근로자의 건강권 보호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도입 찬성 측이 해외 사례를 주요 근거로 앞세우지만 경쟁국들은 노조와의 협의, 건강 보호 조치 등 제약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용우 민주당 의원은 “대만에는 반도체는 물론이고 그 어떤 산업에도 ‘근로시간 통째로 예외’ 법이 없다. 노조 동의하에 하루 4시간, 월 54시간의 연장근로 등만 가능하다”며 “삼성은 지난해 2000여 명에 달하는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했고 노동부가 모두 승인했다. 주 64시간도 부족해서 아예 특별법 형태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만은 특정 산업이나 고액연봉자에게 근로시간 상한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 제도가 없다. 일본의 경우 연구개발 직군에 연 104일 이상 휴일을 보장하고 동의하지 않는 근로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금지하는 등 각종 건강권 보장 조항을 두고 있다.
손우목 전국삼성전자 노조위원장은 “삼성전자는 TSMC 사례로 과로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이미 2년 동안 12차례 연장 근로 한도를 위반해 벌금형 처분을 받은 바 있다”며 “대만에서도 3교대로 인력을 더 투입하지, 기존 개발자를 갈아 넣어 개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근무시간 유연화가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안이라는 접근 방식을 두고도 의문이 제기된다.
HBM을 선행 개발해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있는 SK하이닉스의 경우 연장근로를 도입한 바 없다. 정광현 SK하이닉스 이천노조 부위원장은 “선택적 근로시간제 하에서 구성원들의 자율성과 책임에 기반해 아이디어와 만족도가 증가했다. 그 결과가 HBM”이라며 “전체 근무시간은 주 평균 43시간 정도다. 현재 제도에서 연구개발이 가능하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반도체 특별법 관련 정책 찬반토론에 참석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upload/bk/article/202502/thumb/29035-71118-sampleM.jpg)
#일단 세제·재정 지원부터
반도체 특별법에는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국가 보조금 지원 및 전력과 용수, 인력 양성 등 산업 인프라 지원 등이 포함돼 있다. 여야 합의가 이뤄진 사항이지만 주 52시간 조항을 둘러싼 논쟁에 ‘속도전’이 무색해졌다.
정부와 여당은 연일 반도체 특별법을 띄우고 있다. 한국의 대표 수출 산업인 반도체가 글로벌 무역 전쟁의 직격탄을 맞을 위기 상황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산업 경쟁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부 의견이 엇갈리던 민주당은 지원 안을 우선 처리하고 근로시간 상한제 예외 안은 추후 합의하자는 ‘단계적 처리 구상’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 3일 민주당 정책 찬반토론에서 “개인 의견으로 (이 법을 도입한다면) 한시적으로 하고, 필요할 경우 연장해야 한다”고 밝히자 정치권에서는 민주당도 규제완화로 선회해 법안 처리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6일 민주당은 여야 합의가 이뤄진 세제·재정 지원부터 먼저 통과시키는 방안을 사실상 확정했다.
오는 10~11일 개최 예정이던 여·야·정 국정협의회 4자 회담은 여당 결정에 따라 연기될 것으로 보인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6일 기자간담회에서 “여야 이견이 없는 국가적 지원 부분을 우선 처리하고 여야 간, 노사 간 이견이 있는 노동 시간 적용 제외 문제는 별도로 논의를 지속해 합의되는 대로 처리하자”고 말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7일 원내대책회의를 마치고 “실무협의에서 먼저 교통정리를 하고 합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출한 다음 국정협의회를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다음주 실무협의 결과를 토대로 일정을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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