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드라마나 뉴스를 보다 광고가 나오는 순서가 되면 시청자들은 리모컨을 누른다. 순위 발표식 틈틈이 광고로 시간을 끄는 생방송 경연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들은 이리저리 채널을 옮겨 다닌다. 이같이 채널 돌려 광고를 피하는 시청 패턴을 ‘재핑(회피)’이라고 부른다. 방송사업자는 도망가는 시청자를 붙잡는 꼼수를 부린다. 채널 변경 시 잠깐 표출되는 검은색 화면에 홍보 이미지를 띄워 다시 광고로 노출하는 것. 1, 2초 남짓한 시간이지만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반복 노출 효과를 낼 수 있어 ‘가성비’를 찾는 중소형 광고주에게 인기가 많다.
케이블TV를 이용한다면 경험해봤을 이러한 ‘재핑 광고(채널 전환 광고)’를 두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규제 사각지대 ‘재핑타임’에 대한 자율 규제가 도입된 지 10년이 돼가지만 불편한 시청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다. 케이블TV의 주 고객이 고령층인 만큼 광고 차단 조치를 이용자에게 맡기는 방식으로는 시청권이 충분히 보장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성비’로 케이블TV서 영역 구축
TV 광고의 세계는 진화하고 있다. 재핑 광고는 10년 전 국내 광고기술 벤처기업 재플이 상용화한 신개념 광고 방식이다. 채널을 옮길 때 검은 화면으로 변하는 1~2초의 전송 지연 시간을 개척이 가능한 ‘황무지’로 보고 관련 기술을 개발했다. 2014년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스마트 미디어 서비스 발굴 사업을 통해 재플 컨소시엄의 채널 전환 광고 서비스를 시범사업 중 하나로 선정하고 상용화를 지원했다. 컨소시엄에는 종합유선방송사업자 CJ헬로비전, 씨앤앰(현 딜라이브)이 참여했다. 경영악화를 겪던 재플은 지난해 말 최종 파산해 문을 닫았지만 재핑 광고는 여전히 케이블TV의 주요 광고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재핑 광고는 TV 방송 광고의 주목도와 디지털 매체 기반 타기팅의 장점을 접목한 것이 특징이다. 지역 케이블TV 등에서 재핑 광고 상품을 취급하는 광고업체는 재핑 광고를 두고 “반복적인 강제노출로 주목도가 높다. 채널을 한 번에 많이 이동하려고 리모콘을 계속 누르면 10초 정도까지 지속 노출된다”며 “행사, 이벤트,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좋은 효과를 가지는 광고”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광고대행사 관계자는 “방송 디지털 광고 치고는 매우 저렴한 편이다. 노출 횟수에 따라 비용이 매겨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광고주에게 경제적”이라며 초반엔 전국 단위 대비 지역 케이블에서 집행광고주가 적었지만 점점 확대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짧다고 간과하나’ 자율규제로는 시청권 보호 한계
시청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10년 전 케이블TV 유선방송사업자(MSO) 티브로드와 씨앤앰이 재핑 광고를 도입했을 때부터 시청자 불편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했다. 현재도 불만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직장인 A 씨는 “고향 부모님 댁에 가서 TV를 틀면 채널 사이사이에 광고가 불쑥 뜬다. 최근엔 이틀간 시니어 요금제 광고를 얼마나 봤는지 질려버렸다. 케이블TV마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고 가입 업체를 바꿔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통신망을 활용해 기존의 셋톱박스에 광고 이미지를 미리 저장해뒀다가 송출하는 재핑 광고는 현행 방송법에서 규정하는 광고 유형이 아니다. 사업 개시 당시 미래부와 방송통신위원회에 이를 관할하는 부서 역시 없었다. 규제 공백 공략에 나선 방송사들은 시청자에게 새 광고 도입 사실을 별도로 알리지 않고 사업을 개시했다.
소비자 민원과 시민사회 문제제기에 따라 2015년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재핑 광고 등 새로운 변종 광고를 제재할 수단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후 미래부와 방통위는 자율규제안을 내놨다. △광고 이미지에 ‘채널전환광고는 메뉴>설정에서 해제가 가능하다’는 안내 문구를 삽입하고 △신규가입자 및 사후서비스 신청자가 요청할 경우 직접 채널변경광고를 차단해주는 절차를 도입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자율규제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평가다. 케이블TV는 주 고객층이 고령층이기 때문에 직접 설정을 변경하는 등의 대응력이 떨어진다. 기존 서비스가 불편하다고 IPTV 등 다른 곳으로 이탈하는 비율도 비교적 낮다. 온라인에는 설정 변경법을 공유하거나 A 씨처럼 고령 가입자의 자녀가 케이블 상품의 가격을 비교해 업체 변경을 고민하는 사례가 이어진다. 시청자 보호보다 사실상 시장 길만 열어주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을 내고 이용하는 유료방송의 개념을 고려하면 서비스 구조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석현 서울YMCA 시민중계실장은 “무방비 상황에 광고 서비스를 먼저 끼워 넣고 문제가 되면 나중에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제한 조치를 꺼내드는 익숙한 방식이다.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 정당한 형태는 아니라고 본다”라며 “유료 방송이기 때문에 계약 단계에서 시니어 광고의 노출을 수용하는 고객에게는 혜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고객에게 광고 노출 동의를 받고 차등 금액이나 가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과기정통부와 방통위에는 담당 부서나 실무자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법적 근거가 없고 관리 주체도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방통위 관계자는 “몇 차례 관련 민원이 있었다. 가입 업체 서비스 센터 등에서 조치 받도록 안내하고 있다”며 “다만 방송법 상의 광고를 규제하는 방통위가 다루기 어려운 분야”라고 설명했다. 관련 대응은 신유형 광고를 관할하는 과기정통부에 더 무게가 실리는데, 과기정통부에서는 담당 인력조차 불분명한 실정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방통위 소관 사안 같다”고 답했다.
자율규제 적용 현황을 점검하고 관리할 환경조차 제대로 꾸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유사한 광고 유형도 새롭게 도입됐다. IPTV 가입 가구를 대상으로 하고 특정 제휴 채널에 진입할 때만 송출되는 서비스인데, 기본 원리는 재핑 광고와 유사해 시청자 불만이 예상된다.
한석현 실장은 “유료방송에 대한 시청자들의 주요 불만 중 하나는 채널 전환 속도 지연인데 이 재핑 타임에 광고를 넣으면 불만이 커지는 게 당연하다”며 “유료방송 산업 환경이 녹록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탈 요인이 증가해 오히려 악수가 되기 쉽다. 정책 당국에서 신유형 광고 등 규제를 언제까지, 얼마나 완화해줄지를 두고 고민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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