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언제부턴가 겨울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서울 명동의 신세계백화점이 매년 연말을 앞두고 본점 본관 건물에 설치하는 미디어 파사드다. 광장을 향한 넓은 벽면 위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영상이 SNS 등에 퍼지면서 신세계 본점 앞은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를 즐기려는 관람객들이 필수로 방문하는 장소가 되었다. 건물 외벽을 활용한 국내 미디어 파사드가 신세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동 특유의 오밀조밀한 분위기와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 외관이 조화를 이루면서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신세계 측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는지, 지난 11월 아예 건물 전면을 전부 덮는 초대형 전광판을 설치했다. 농구장 크기의 약 3배(1,292.3㎡)에 달한다는 전광판이 쉴 틈 없이 작동하며 백화점에서 취급하는 명품 광고부터 크리스마스 사이니지 영상에 이르기까지 화려함을 뽐낸다. 연말에 한시적으로 이뤄졌던 영상 송출이 상시 진행되는 이른바 ‘신세계스퀘어’의 등장이다. 이는 명동 일대에 10년간 3단계에 걸쳐 전광판 16개와 거리 미디어 80기를 설치, 미국 뉴욕의 타임스스퀘어에 버금가는 공간으로 키우겠다는 명동스퀘어 계획의 일환이다.
1930년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으로 개관한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규칙적으로 늘어선 수직 창이 인상적인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으로 꼽히는 프랑스 봉 마르셰, 영국 해러즈 백화점의 외관과 구성을 모방했다는 설도 있다. 처음에는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건립되었고,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증·개축을 거쳐 6층 규모로 변했다. 서울 도심부 재개발 이전까지 인근에서 손꼽히게 컸던 이 건물은 이제 주변 마천루에 밀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특유의 고풍스러움은 여전하다.
철제 프레임을 조립해 설치했던 기존 파사드는 건축물 외관을 많이 반영한 형태였다. 이제 그 자리는 단지 거대한 전광판으로 바뀌었다. 압도적인 규모가 확실히 장관이기는 하다. 대부분 단순 광고 영상을 송출하는 낮에도 이를 보기 위해 멈춰 선 관람객이 적지 않다. 효율적인 전력 설계와 자연 냉각을 통해 10년 동안 교체 없이 운영할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기술 발전을 보여 준다.
그러나 기존 파사드가 인기를 끈 이유는 건물의 클래식함과 그래픽이 적절히 섞여 이루는 조화에 있었다. 평소에는 일반 건축물로 기능하다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일상에서 벗어난 듯한 환상을 보여주는, 백화점과 캔버스를 오가는 변신에 기존 파사드의 묘미가 존재했다. 고정 전광판인 신세계스퀘어의 설치로 이제 본점 전면은 영상 없이 지속될 수 없는 검고 텅 빈 공간이 되었다.
신세계 본점은 대표적인 근현대 건축물이라는 특색을 잃고 서울 곳곳의 다른 미디어 파사드와 다를 바 없어졌다. 전광판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면은 있으나, 그간 쌓인 헤리티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 아쉽다. 큰 화면을 원하면 영화관에 가면 된다. 신세계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방문객 수 59%, 체류 시간이 50%가량 증가했고, 열흘 만에 20만 명이 돌파했다고 설명하지만, 성장세가 장기간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명동과 뉴욕이 비슷하다면 사람들이 굳이 명동에 오려고 할까.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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