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서동재를 주인공으로 한 ‘좋거나 나쁜 동재’가 끝났다. 서동재는 이수연 작가의 히트작 ‘비밀의 숲’ 시리즈에서 조연이었던 캐릭터로, 시즌1 초중반까진 세미 빌런에 가까운 포지션이었으나 말미와 시즌2에선 ‘우리 동재’ ‘우그 동재(느그 동재+우리 동재)’라 불릴 만큼 주연 못지 않게 시선을 사로잡았던 인물이다. 선악의 구도로 가늠할 수 없는 서동재는 배우 이준혁을 만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활개를 펼쳤고, 결국 스핀오프 드라마 ‘좋거나 나쁜 동재’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좋거나 나쁜 동재(좋나동재)’는 당연히 황시목(조승우)이 주인공이었던 ‘비밀의 숲(비숲)’과 완전히 결이 다르다. 비장미 넘치는 BGM과 함께 출발한 드라마 오프닝에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을 보던 서동재는 이내 좌절한다. 초유의 범죄자를 놓쳐서? 부당한 판결을 받아서? 노노. 서동재를 좌절시킨 건 단순한(?) 승진 누락이다. 이어 부부장검사로 승진한 옆방 후배 조병건(현봉식)이 위로하는 척 깐죽깐죽 약을 올릴 때 동재는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지만, 홀로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욕설과 괴성을 터뜨린다. ‘아, 우린 지금 동재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고 있지’를 실감케 하는 오프닝이었다.
‘좋나동재’의 매력은 절대적으로 서동재란 인물에 있다. 서동재는 ‘비숲’에서 뇌물을 턱턱 받는 비리 검사에, 수 틀리면 상대를 윽박지르거나 위해를 가할 것처럼 구는 밉살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의 흔한 빌런처럼 누군가를 죽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정도의 범죄까진 저지르지 못한다. 그저 보통의 나쁜 인간 정도랄까? ‘좋나동재’에서도 더 이상 뇌물은 받지 않지만 범죄자를 뿌리뽑아 정의를 구현하려는 올곧은 검사와는 거리가 멀다. 서동재는 여전히 혓바닥이 길고, 처세는 현란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짠하게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서동재는 (황시목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입할 만한 요소가 차고 넘친다. 그는 분명 사회 엘리트 계층인 검사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선 대우받지 못한다. 재벌 딸과 결혼한 이창준(유재명)이나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지만 법무부장관 출신 아버지를 둔 영은수(신혜선), 그리고 출세욕은 없지만 비상한 기억력을 지녀 ‘브레인’으로 꼽히는 황시목 등 서동재의 주변 선후배는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다. 반면 서동재는 ‘지거국’ 출신에 든든한 ‘빽’도 없어 출세에 한계가 있다.
심지어 ‘비숲’ 시즌2에서 동재는 서울대 동문회에서 취한 상사의 대리운전까지 불려 나가는 비참한 상황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비숲’에서 이창준(유재명)에게, ‘좋나동재’에선 부장검사 전미란(이항나)에게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서동재의 모습은 짠하다. 그의 허리와 무릎은 한없이 가볍지만, 그 가벼움 뒤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를 평범한 사람들은 진하게 공감하게 된다. 보통 삶이 그렇지 않나. 거창한 정의를 부르짖기보다는 내 밥그릇, 내 승진이 더 소중한 것처럼.
드라마 초반 배당 받은 교통사고에서, 피해자가 일부러 고가의 미술품을 ‘특송’으로 배달시키지 않았단 사실을 간파한 조병건 검사와 달리 서동재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황시목이라면 단번에 알았거나 설령 몰랐어도 아무렇지 않게 후배에게 심플하게 물어봤을 테지만, 서동재는 후배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은근슬쩍 믹스커피를 권하며 후배에게 접근하다 비웃음을 산다. 나보다 뛰어난 후배가 은근히 나를 얕본 경험, 흔한 일 아닌가. 장기 미제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고도 제대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CCTV를 보며 비장하게 황시목에 빙의된 듯 사건을 시뮬레이션하다 결국 한계에 마주하고 “아이씨, 진짜 모르겠네, 씨” 하는 동재의 모습은 인간적이기 그지없다. 그렇다. 우리 대다수는 황시목보단 서동재에 가깝다.
‘좋나동재’에서 건설업자 남완성(박성웅)에게 과거 평당 15만원 하던 시골 땅을 선물 받았던 서동재가 뒤늦게 그 사실을 기억하고 나서 고민하는 장면도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기억도 못했던 땅이 재개발 예정지에 포함돼 최소 수십 억원대를 호가할 거란 사실에, 어차피 출세도 못할 거면 얼굴에 철판 깔고 건물주나 되어 살까 진지하게 궁리하는 동재의 모습에 누가 침을 뱉으랴. 그러다가도 못미더운 자신을 믿어주는 선배를 만나곤 “그래, 쪽은 팔리지 말자”며 자신을 단도리하는 모습을 보라. 서동재의 과거 잘못은 비호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우리는 누구나 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을 덮기 위해 더 잘못된 행동을 할 때가 있음을 안다. 그것을 딛고,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어렵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서동재에게 혀를 끌끌 차더라도 일말의 연민을 갖고 대하게 되는 것이리라.
‘좋나동재’는 현실에 발을 붙인 서동재란 인물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배우 이준혁의 노력이 십분 느껴지는 작품이다. ‘인생 캐릭터’를 만난 이준혁의 열연은 그야말로 ‘좋나동재’의 알파요 오메가. 이준혁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베테랑 검사의 짬이 돋보이면서도 허당기가 넘치는 서동재 그 자체로 보인다. 진중함과 가벼움을 순식간에 오가는 순발력과 코믹한 연기가 특히 발군.
다른 인물들도 다채로운 매력을 발휘한다. 서동재와 앙숙 케미를 빚는 조병건 역의 현봉식이나 카리스마 있지만 꿍꿍이가 있는 부장검사 전미란 역의 이항나, 시크한 후배 김지희 검사 역의 정운선 등 청주지검 사람들 모두 입체적이다. 그간 여러 작품에서 빌런 역으로 상당히 많이 소비된 감이 있던 박성웅은 ‘좋나동재’의 남완성으로 뻔한 듯 뻔하지 않은 악인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남완성의 변호사 주정기로 분한 정희태의 연기도 훌륭하다. ‘비숲’과의 연결고리를 책임진 강원철 역의 박성근도 반갑다.
모두가 주인공을 꿈꾸지만(모두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지만), 누구나 멋들어진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세상에서 서동재는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비숲’ 같은 히트작은 못되었어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좋나동재’의 시즌2가 나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스핀오프로 성공이 아니겠나. 더불어 나날이 빛나는 이준혁의 미모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정수진의 계정공유]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이토록 주도면밀한 드라마라니
· [정수진의 계정공유]
'전, 란', 강동원과 박정민 그리고 차승원이 빚어내는 조선시대 아포칼립스
· [정수진의 계정공유]
'흑백요리사' 이건 최현석을 위한 판! 근데 이제 백종원을 곁들인
· [정수진의 계정공유]
사이다와 도파민 없어도 몰입되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 [정수진의 계정공유]
그래도 가족, 그러니까 가족인 '파친코'와 '장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