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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전, 란', 강동원과 박정민 그리고 차승원이 빚어내는 조선시대 아포칼립스

전쟁과 반란 사이 벌어진 민중의 저항 다룬 사회적 영화…높은 감도의 액션과 감각적 화면 연출 돋보여

2024.10.11(Fri) 11:26:09

[비즈한국] ‘전, 란’이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를 잡는 첫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영화가 될 수 있을까. 그간 넷플릭스는 드라마와 예능에서 발군의 콘텐츠를 선보여왔지만 영화에선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10월 11일 공개되는 ‘전, 란’은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하고, 강동원과 박정민이 주연을 맡은 사극으로 기대를 모은 작품. 지난 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사상 최초로 개막작으로 선정된 OTT 영화로도 화제를 모았는데, 상영 후 반응은 ‘그럴 만하다’는 중론이다.

 

유년시절을 함께하며 신분제와 상관없이 동무로 지냈던 종려와 천영. 그러나 주변의 시선과 갑작스러운 임진왜란이 겹치며 둘의 관계는 달라진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전, 란’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 천영은 양인 출신이나 부모의 빚으로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하며 도련님인 종려의 잘못 대신 매질을 맞는 신세가 된다. 강단 있는 천영과 반대로 무신 명가의 후계를 이어야 하는 종려는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은 따스한 성품을 지닌 인물. 어린 시절을 함께하며 두 사람은 신분을 뛰어넘는 동무로 지내게 된다. 

 

‘전, 란’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지만 전쟁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전쟁의 시작을 보여주고 이내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조선을 들여다본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그러나 조선은 엄연한 신분제의 나라. 노비에서 면천되길 원하는 천영과 그를 도우려는 종려의 관계는 주변에 의해 점점 어려워지고,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왜란을 계기로 종려 집안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종려의 가족들이 모두 죽는데, 종려가 이를 천영이 주동한 것으로 오해하며 ‘흑화’하게 되는 것. 과거 천영이 종려와 무술을 겨룰 때 종려에게 “네 칼엔 분노가 없어”라고 말하자 종려가 “걱정 마. 진짜 적만 만나면 내 칼에도 분노가 실릴 터이니”라고 답한 적이 있는데, 얄궂게도 동무였던 천영이 적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의 ‘명존세’를 가리자면 단연 선조.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인 때문인지 선조는 전쟁 직후 경복궁을 재건하며 왕실의 위엄을 재건하는 데만 매달리는 모습으로 분노를 산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전, 란’은 전쟁으로 인한 난리를 뜻하는 전란(戰亂) 사이에 굳이 쉼표를 넣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전’ ‘쟁’ ‘반’ ‘란’ 네 챕터로 나뉘는데, 특이한 것은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은 시작만 보여주고 직후 ‘7년 후’ 자막이 나오며 전쟁 직후를 들여다본다는 것. 외부의 침입으로 인한 전쟁이 기점이 되지만 내부의 분열로 인한 반란에 방점이 찍힌다. 이때 반란의 기폭제가 되는 것은 신분제로 인한 폐해다.

 

영화는 시작부터 ‘천하는 공공의 것이니 주인이 따로 없으며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에 격분하는 선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양인으로 살던 어린 천영이 갑자기 노비가 된 것은 어미가 빚으로 천민으로 팔려가면서 부모 가운데 한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 된다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이 국법이기 때문이었다. 평화롭던 시기에 신분제는 공고하지만, 전쟁이 빚은 혼란의 시대엔 반란과 변화의 갈망이 넘실거린다. 왜란이 일어나면서 나라에 공을 세우면 양인은 상을 내리고 천민은 면천(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준다는 실낱 같은 희망이 퍼지지만, 지배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한 톨 내어주는 것에 인색하다. 

 

호남 유생 출신 의병장인 김자령. 신분과 관계없이 백성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양반 티는 벗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조선 의병장 김덕령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그렇기에 ‘전, 란’은 임진왜란 전후의 16세기를 보여주는 사극인 동시에 여전히 민중을 ‘개돼지’로 보는 지배세력이 공고한 현대에도 통용되는 사회적 영화로 읽힌다. 왜란이 일어나자 수도와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하는 선조의 모습과 이에 분노하여 경복궁을 불태우는 백성들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도무지 견디다 못해 임금 일행을 공격하는 백성들을 무참히 베는 종려의 모습과 (비록 면천의 욕심 때문일지언정) 백성들을 지키고자 왜군들을 베는 천영의 모습이 대비되는 장면에선 전율이 인다.

 

전쟁이 끝났으나 피폐해진 나라와 백성을 돌보기보다는 무너진 궁궐을 재건해 왕권의 위엄을 복원하려는 데만 급급하거나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의병장 김자령(진선규)을 시기하는 선조의 모습, 전쟁 동안 부왜(왜국에 붙어 나라를 해롭게 하는)했던 청주목사가 전쟁이 끝난 후 뻔뻔스럽게 연회를 벌이는 모습에선 소위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깊은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도리깨를 휘두르는 여성 의병 범동 역의 김신록. 인간미 넘치는 김자령을 따르지만 왜적만큼이나 신분 질서가 공고한 사회도 질색인 인물이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그렇다고 ‘전, 란’이 마냥 무거운 것만은 아니다. 정치사회적 메시지가 다분하지만 감각적인 액션이 돋보이는 사극 대작의 기본에 충실하다. 액션의 감도가 훌륭한데, 노비임에도 기품 넘치는 검술을 선보이는 천영 역의 강동원은 자신의 피지컬을 활용한 액션을 유감없이 펼쳐낸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공격을 구사하는 종려, 일본 전통 검술 특유의 절도 있는 발검과 자세를 보여주는 왜장 깃카와 겐신(정성일) 등 각자 구현하는 액션의 특색이 달라 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천영, 종려, 겐신이 물고 물리는 해무 속에서의 3인 액션 신은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 이외에도 도리깨를 호쾌하게 휘두르는 여성 의병 범동(김신록), 절제된 의병장의 검술을 보이는 김자령(진선규)의 액션도 눈에 든다.

 

조선인의 코를 베어가는 ‘비귀’로 악명을 떨친 깃카와 겐신. 천영의 남다른 검술을 알아보며 둘만의 대결을 원했고, 천영과 종려의 검술이 다른 듯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인물이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화면의 ‘때깔’도 좋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공동경비구역 JSA’ 미술감독과 ‘기생충’의 포스터를 맡았던 김상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감각적인 화면을 연출해낸다. 청천익(푸른 빛깔의 철릭)을 입으며 ‘청의검신’이라 불리는 천영과 그와 대비되는 종려의 홍색 철릭이 빚어내는 색채의 대비부터 폐허가 된 경복궁의 풍경 등이 시선을 붙든다. 폐허가 된 조선시대의 모습은 가히 ‘조선 아포칼립스’라 할 만하다. 록과 창소리를 넘나드는 세련된 음악 역시 이 영화의 강점. 

 

천영과 동무처럼 지냈던 종려는 천영을 오해하며 흑화한다. 영화에서 감정의 파고가 가장 높은 인물로, 박정민은 다채로운 감정 변화를 펼쳤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배우들의 연기로 눈길을 돌리면, 무능하고 찌질한 선조의 모습을 소름 끼치게 구현한 차승원을 먼저 칭찬하고 싶다.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뻗친 수염의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선조는 그야말로 관객의 분노를 유발하며 몰입하게 만든다. 조용한 카리스마를 보이는 겐신 역의 정성일과 뜨겁고도 순수한 분노를 보여주는 범동을 맡은 김신록의 열연도 돋보인다. 

 

‘전, 란’은 10월 11일, 오늘 공개된다. 러닝타임 128분. 과연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영화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을지 기대를 걸어본다.

 

종려의 붉은 옷과 대비되는 청색 의상을 입으며 ‘청의검신’으로 불리는 천영. ‘형사 DUELIST’ ‘전우치’ ‘군도: 민란의 시대’에 이어 또 한 번 강동원이 사극 액션의 장기를 펼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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