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K팝은 대한민국 최고의 수출품이 됐다. 그러나 화려함 뒤에는 그늘도 깊다. K팝의 상징인 아이돌은 이른 나이에 발탁돼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노동권과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다. 데뷔조차 못 한 무수한 연습생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비즈한국은 ‘K팝: 이상한 나라의 아이돌’ 시리즈를 통해 K팝이 성장하는 동안 외면했던 문제점을 짚고, 다각도로 대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K팝을 만드는 이들이 건강해져야 K팝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해, ‘아이돌 명가’ SM엔터테인먼트가 사교육 시장을 뒤흔들었다. 입시 학원이 몰려 있는 서울 대치동에 ‘SM유니버스 학원’을 오픈했기 때문이다. 모델 기획사 에스팀, 종로학원과 함께 K팝 아이돌 지망생을 위한 학원을 만든 것. 이곳에 입학하기 위해선 학교를 ‘자퇴’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렸다. K팝 스타가 되고 싶은 아이들은 고등학교 진학 대신 2년간 이 학원에 다녀야 했다. 학원비도 월 200만 원이 넘는다. 그렇다고 ‘연습생 합격’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꿈’ 장사를 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런데 최근 SM유니버스가 교육 과정을 전면 개편한 것으로 확인됐다. SM유니버스는 더 이상 자퇴를 요구하지도, ‘학교’의 대안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학원을 연 지 약 1년 반만의 일이다. SM은 왜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었을까? SM유니버스 학원의 장재원 대표를 만나봤다.
#‘자퇴해야 입학 가능’ 트랙 제도 폐기했다
‘대안 학교’처럼 아이들을 교육한다던 SM유니버스는 최근 ‘트랙 제도’를 폐지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2년간 아티스트 트랙, 프로듀서 트랙으로 전공을 나눠 교육하기로 한 제도를 없앤 것. 대신 모집대상을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로 낮추고 ‘단과’ 프로그램을 늘렸다. 성인 대상 수업도 별도로 만들었다. ‘대안 학교’가 아닌 ‘학원’이라는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오기로 한 거다.
단과 수업은 댄스, 보컬, 작곡, 작사, 프로필, 오디션, 아티스트 비즈니스 클래스 등으로 개편됐다. 비단 ‘아이돌’이 되고 싶은 학생뿐 아니라 작곡가나 프로듀서를 지망하는 학생들도 수업을 들을 수 있다. K팝 관련 ‘비즈니스’도 배울 수 있다. 정부 지원을 받아 개설한 수업들도 있다. 최근에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디벨로퍼와 엔지니어 양성 과정 수업을 열었다. ‘버추얼 콘텐츠’ 등 K팝 산업의 디지털 기술을 전액 국비 지원으로 배울 수 있다.
SM유니버스는 왜 갑자기 노선을 바꿨을까? 장재원 SM유니버스 대표는 “아이돌을 선발하는 연령이 점점 어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등학생 나이부터 연습생을 선발하는 기획사가 늘어나는 만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SM유니버스 학원의 트랙 제도가 애매해진 탓이다. 장재원 대표는 “현재 상황에서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준비해서 데뷔를 하기는 정말 어렵다. 연습생 선발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어서다. 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학원에 입학해야만 아이돌 연습생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그런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장재원 대표는 SM유니버스 학원의 목표가 ‘아이돌’ 양성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 이유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K팝 인프라의 확대다. SM엔터테인먼트와 방향이 다른 이유다. K팝에 관심 있는 해외 학생들을 육성하고, 업계 전반이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커리큘럼을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작곡가, 프로듀서 육성 과정이나 ‘전직’ 또는 ‘취미’를 위한 성인반도 넣었다.”
SM엔터테인먼트의 ‘인재 수급’ 목적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비단 실력이나 외모뿐 아니라 기획사마다 원하는 인재상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재능과 관심사에 맞게 조언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SM뿐 아니라 FNC, 피네이션 등 다양한 기획사에서 단독 회사 오디션을 요청해 진행한 적도 있다.”
현재 SM유니버스 학원의 수강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40대 성인까지 고루 분포한다. 미성년 학생들은 350여 명, 성인은 150여 명이다. 정부 지원 사업 수강생들은 45명이다. 분야별 전임 교사 5명이 있고, 강사는 총 65명이다.
장재원 대표는 향후 K팝 교육자를 육성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K팝의 범위를 넓히고, 그것을 해외로 확장하는 것이다. 여기에 맞게 다양한 분야의 과목을 만들고 싶다. 현재도 우리 학원의 강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K팝을 배우고 싶어도 제대로 아는 교사가 없다고 한다. K팝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자를 배출하고 싶다.”
#목표는 ‘해외 진출’
지난 2022년 SM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한 장재원 대표는 본래 해외 투자 컨설팅 전문가였다. 지난해 4월 SM유니버스 대표로 취임한 그에게도 K팝은 아직 낯설다. 그러나 K팝의 영향력만큼은 실감하고 있다. “요즘은 내가 딸보다 K팝을 더 많이 듣는다. 미국에서 MBA를 취득했는데, 올해 모교에서 ‘한국어’를 정식으로 가르친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른 과목과 다르게 학생들이 먼저 요청해 과목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K팝을 통해 한국 전반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이다. 언어뿐 아니라 K팝 산업을 가르치는 과목도 열렸다고 한다.”
여느 대형 입시학원처럼 아이돌 학원을 전국에 확장하려는 계획은 없을까. SM유니버스는 현재 대치동에 위치한 사옥을 제외하고는 국내에 지점을 늘릴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SM유니버스의 최종 목표는 ‘해외’ 진출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를 시작으로 SM유니버스 학원을 늘리는 게 목표다. 지금은 싱가포르에 설립하기 위해 논의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점을 늘리는 게 아니라 K팝 과목을 설립한 대학교와 협업하고, 지방에 있는 학교를 찾아가 파견 교육을 하는 등 ‘협업’의 방식을 택할 것이다. 미국도 할리우드가 있으니 이를 기반으로 전 세계에 사람이 모이지 않나, K팝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 대표는 K팝이 지속 가능하려면 산업의 인프라가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이돌 연습생을 하다가 데뷔를 못 하면 그냥 끝이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국·영·수 등 기본 교육도 해주어야 하고, 다른 길을 갈 수 있게 방향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꼭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작곡가가 될 수도, 뮤직비디오 감독이 될 수도 있다. 여러 갈래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생활 체육처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인프라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장 대표는 K팝을 교육적으로 정의하고, 이론을 정립해 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K팝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많지만, 해외에 가보면 K팝을 제대로 알고 배울 기회가 적다. K팝 학원을 가도 ‘커버 댄스’를 가르치는 정도다. 해외에서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고, 국내로 오는 외국인들을 적극 유인할 계획이다.”
약 1년 6개월간 SM유니버스 학원을 운영하면서 장재원 대표가 느꼈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K팝에 적합한 교육자를 찾기 어렵고, 둘째는 한국에 온 외국 학생들의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점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한 학원에서는 모든 선생님이 적어도 전문대 이상 학위가 있어야 한다. ‘스걸파(스트릿댄스 걸스 파이터)’에서 1등 한 친구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우승 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뛰어난 친구를 섭외하고 싶었지만, 우리 학원에서는 강사를 할 수가 없다. 산업 특성과 상관없이 무조건 학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K팝의 특성에 맞게 기준이 생겨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청소년을 가르칠 수 있는 다른 기술이나 교육을 받게 하는 방법도 있겠다.”
K팝만 보고 한국에 온 외국인 학생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다. “최근 한류비자(K팝 등 한류를 배우러 올 수 있는 단기 체류 비자) 신설을 정부에 건의해 긍정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문제는 이 친구들이 자국의 교육을 포기하고 온다는 거다. 외국인 연습생 학부모들이 걱정하는 건 데뷔하지 못하더라도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지, 한국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지다.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한국 콘텐츠를 생산할 능력을 배운다면 학창시절을 포기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자국의 검정고시를 합격하더라도 한국 대학은 진학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규제들은 완화할 필요가 있다. 세계의 우수한 인재를 모으기 위해서는 K팝을 기반으로 여러 진로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장재원 대표는 K팝이 잠깐의 인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K팝 문화와 콘텐츠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데뷔하지 못한 연습생들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앞으로는 지역적으로 확대되는 게 중요하다. K팝도 다양한 형태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SM유니버스의 역할은 K팝 산업에 대한 교육 과정을 표준화하고, 해외로 확대하는 일이다.”
[K팝: 이상한 나라의 아이돌] 인터랙티브 기사 보러 가기: kpop.bizhankook.com
※다음 편에는 K팝의 성공 뒤에 가려진 아동·청소년의 노동과 인권에 대한 국회 토론회 기사가 이어집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전다현 기자
allhyeon@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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