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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사이다와 도파민 없어도 몰입되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인간의 이기심 한계 보여주는 심리 스릴러…진범 정체 둘러싸고 끝까지 긴장감 고조

2024.09.25(Wed) 11:06:23

[비즈한국]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은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백설공주)을 보다 보면 누차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14부작에서 11화까지 방영된 지금, 이런 질문에 천착하다 보면 슬금슬금 인간에 대한 혐오가 생겨날 지경. 그만큼 ‘백설공주’는 핍진성 있는 전개와 쫀쫀한 몰입감, 깊게 사유하게 되는 메시지로 시청자의 눈과 귀를 붙든다.

 

주인공 정우를 맡은 변요한은 남부럽지 않던 고등학생에서 지옥 같은 10년을 거치고 달라진 눈빛을 가진 30세 청년까지 복잡다단한 연기를 유려하게 펼쳐낸다. 사진=MBC 제공

 

19세 소년이 있다. 항상 반장을 맡는 모범생인 데다 많은 친구들이 따르는 서글서글한 성격을 갖췄고, 인품 좋은 지역 유지 부모님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예쁜 여자친구도 있고, 명문대 의대를 수시합격한 상태라 뭐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인생. 마치 동화 속 백설공주처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던 소년 고정우(변요한). 그런데 그가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된다. 혼자 술을 잔뜩 마시고 기억이 끊긴 어느 밤, 자신의 여자친구 박다은(한소은)과 여사친 심보영(장하은)이 살해당했다. 두 여학생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모든 정황증거는 정우를 가리키고 있고, 정우는 그들을 죽인 기억도 없지만 죽이지 않은 기억도 없다. 말 그대로 블랙아웃이다.

 

드라마 ‘미스티’의 케빈 리로 대중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던 고준이 내면의 상처를 가진 채 정우를 도와 진실을 밝히는 형사로 분했다. 사진=MBC 제공

 

정우의 인생은 전광석화처럼 결정된다. 미성년자일 때여야 감형 받을 수 있다는, 아버지 친구이자 담당 수사반장이었던 현구탁(권해효)의 조언에 따라 경찰조사부터 최종선고까지 걸린 시간은 80일. 10년형을 선고받고 20대 청춘을 지옥 같은 감옥에서 보낸 뒤 무천마을로 돌아온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여전히 마을에 살면서 아들의 죗값을 치르듯 동네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고 있는 엄마 정금희(김미경)마저 정우에게 마을을 떠나라 한다. 정우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떠나려는 날, 엄마 금희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추락하고 의식을 잃는다. 10년 세월로 죗값을 치렀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일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정우의 부모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깊은, 더없이 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높은 인품은 처절하게 배신당한다. 김미경과 안내상이 정우의 부모를 맡아 절절함을 더한다. 사진=MBC 제공

 

‘백설공주’는 정우가 그날 밤의 진실을 쫓아 친구들의 시신을 찾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고군분투를 낱낱이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요즘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사이다 전개’나 ‘도파민 분출’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10년의 시간을 딛고 진실을 찾으려는 정우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시청자가 함께하는 공감대가 자리잡는다. 그 공감대가 얼마나 개연성 있게 쌓여 입맛에 착착 붙는지, ‘꿀고구마 전개’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사실 ‘백설공주’는 처음부터 진범 혹은 공범으로 의심 가던 인물들이 확연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아들임에도 냉정하게 수사를 진행하던 현구탁, 현구탁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국회의원 예영실(배종옥)과 그의 남편인 무천사랑병원 원장 박형식(공정환). 폐쇄적 성향의 소도시 작은 마을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라 초반부터 포커싱되며 의심을 샀는데, 이들의 행적이 밝혀지는 과정이 개연성 있고 탄탄하여, 처음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음에도 뻔하지 않다. 권해효, 배종옥, 공정환 등 중량감 있는 배우들의 열연이 뒷받침된 덕분이기도 하다.

 

살해당한 정우의 여사친 심보경의 아빠를 연기한 조재윤. 심보경의 아빠 심동민과 엄마 이재희는 그날 밤의 진실에서 비껴나 있지만, 그들 역시 딸의 죽음에 떳떳하게 슬퍼할 수 없는 입장이다. 사진=MBC 제공

 

마찬가지로 초반부터 묘하게 쎄한 구석이 있었으나 권력형 인물들에 비해 덜 의심이 갔던 마을사람들과 정우 친구들의 묘사는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한 마을에 나고 자라면서 서로의 집 숟가락 숫자도 알 만큼 가까운 사이로 묘사된 이들의 진면모가 한 꺼풀씩 밝혀질수록 시청자들은 분개를 넘어 할 말을 잃게 된다. 이들의 묘사가 진정 무서운 점은 평범한 사람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얼마나 자기자신만을 위하는지, 얼마나 추악하게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 내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 남의 자식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잔인함, 그를 덮기 위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합리화하는 뻔뻔한 이기심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걸 보며 인간에 대한 혐오가 들면서도 문득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곱씹게 되는 건 덤. 

 

형사 노상철과 더불어 유이하게 마을의 외부자 입장인 의대 휴학생 하설. 진실의 키를 쥐고 있는 수오와 절친하여 정우의 결백을 돕게 된다. ‘SKY 캐슬’의 김혜나로 인상 깊은 김보라가 연기했다. 사진=MBC 제공

 

정우의 친구들을 연기한 최나겸 역의 고보결, 양병무 역의 이태구, 이우제 역의 신민수, 현수오·현건오 역의 이가섭 등 젊은 배우들과 부모 세대를 연기한 차순배, 이두일, 조재윤, 이정은, 박미현 등 중견 배우들의 조화도 좋다. 젊은 배우들은 이 작품으로 인지도가 대폭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탄탄한 대본과 더불어 영화 ‘화차’로 유명한 변영주 감독의 섬세한 연출로 진실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을 그날 밤의 진실’은 11화를 기점으로 상당부분 밝혀진 상태. 그러나 이 작품의 묘미는 진범이 누구인가만큼 정우를 살인자로 몰았던 이들의 관계성과 심리가 중요한 만큼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청자들의 호응도 높아지고 있다. 2.8%로 시작한 시청률은 11화에서 8.7%로 3배가량 뛰었다.

 

무천시 국회의원 예영실과 무천경찰서장 현구탁, 그리고 정우의 친구이자 톱스타가 된 최나겸. 드라마에서 대부분 인물들이 포를 뜨듯 정우의 고통에 한몫 하지만, 이들 셋의 존재야말로 드라마의 긴장감을 끝까지 잃지 않게 하는 중추라 할 수 있다. 사진=MBC 제공

 

미스터리가 풀리고 권선징악이 이루어질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과는 별개로 ‘백설공주’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드라마를 보면서 잃어갔던 인간에 대한 믿음을 조금이나마 회복시킬 여지를 보여줬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드라마에 너무 몰입돼 있는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 것 같거든. 그래도 인간의 선의란 게 있다는 걸 믿고 싶거든.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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