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다. 괜히 오버하지 말고 적당히 주어진 일들만 잘 해결해도 별 탈 없이 버틸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우주에서 이 격언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블랙홀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블랙홀의 세계는 중간이 없다. 아주 가볍거나, 아주 무겁거나, 질량의 양극단에서만 블랙홀이 발견되었다. 그 사이 어중간한 중간 질량의 블랙홀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중간 질량 블랙홀이 하필이면 이상한 곳에 바글바글 숨어 있어서 아직 그 존재를 찾지 못했을 뿐인지, 아니면 애초에 중간 질량 블랙홀 같은 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확실치 않다. 여전히 많은 천문학자들이 블랙홀의 질량 분포에서 텅 비어 있는 이 간극을 채우기 위해 중간 질량 블랙홀을 찾고 있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중간 질량 블랙홀의 망령을 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중간 질량 블랙홀로 의심되는 유력한 현장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블랙홀 목록에 중간 질량 블랙홀을 이제 겨우 하나 추가했을 뿐이지만, 있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던 것과 하나라도 그 존재를 발견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이제 중간 질량 블랙홀이 존재하지 않는 망령일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발견하기 까다로운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어딘가 숨어서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블랙홀은 질량 규모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태양 질량의 수십 배에서 최대 100배 정도로 무거운 블랙홀들이 있다. 이런 블랙홀은 아주 무거운 별이 진화를 마치고 중력 붕괴를 하면서 만들어진다. 이를 항성 질량 블랙홀이라고 한다. 흔히 ‘별이 죽어서 블랙홀이 된다’라고 이야기할 때의 그 블랙홀이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블랙홀 세계에서 라이트급 블랙홀이다.
이보다 훨씬 무거운 헤비급 블랙홀도 있다. 보통 은하 중심에서 발견되는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다. 이들은 태양 질량의 수백만 배에서 수십억 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질량을 갖고 있다. 당연히 이런 거대한 블랙홀은 별 하나가 죽어서 만들어진 건 아닐 것이다. 오래전 은하 중심부에 바글바글 모여 있던 항성 질량 블랙홀들이 서로 반죽되고 성장하면서 지금의 육중한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빅뱅 직후, 우주 초기에 거대한 가스 구름이 한꺼번에 수축되면서 곧바로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무거운 별 하나가 죽으면 항성 질량 블랙홀이 된다. 거대한 은하 중심에는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아주 무겁지도 아주 가볍지도 않은 미들급 수준의 블랙홀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태양 질량의 천~만 배 정도 질량을 가진 블랙홀도 충분히 있어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중간 질량 블랙홀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의 빈자리는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 단순히 가벼운 항성 질량 블랙홀들이 모여서 병합된 결과일지 모른다는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라이트급 블랙홀이 모여서 서서히 덩치를 키운 결과가 지금의 헤비급 블랙홀이라면, 당연히 그 중간 과정에서 미들급 블랙홀의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미들급 블랙홀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건,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 애초에 가벼운 블랙홀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게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만약 중간 질량 블랙홀이 정말 어딘가 숨어 있는 것이라면, 대체 어디를 살펴봐야 할까? 거대한 은하 중심에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 있으니, 그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왜소은하 또는 구상성단 중심에서 기대해볼 수 있다. 실제로 최근까지 일부 관측에서 우리 은하에 비해 규모가 1000배 가까이 훨씬 가벼운 왜소은하 중심에서 중간 질량 블랙홀의 흔적으로 의심되는 다양한 신호를 포착했다. 하지만 아직 그 결과는 아직 확실치 않다.
중간 질량 블랙홀을 찾는 데에는 우리 은하 중심의 궁수자리 A* 초거대 질량 블랙홀의 존재를 관측으로 처음 확인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독일의 천문학자 라인하르트 겐젤과 안드레아 게즈는 1990년대부터 우리 은하 중심에 살고 있는 괴물을 쫓는 관측을 시작했다. 그들은 각각 하와이 마우나케아의 켁 망원경과 칠레 초거대 망원경을 활용해서 우리 은하 중심부에서 궤도를 도는 별들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별들이 높은 밀도로 바글바글 모여 있는 우리 은하 중심부에서 별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분간하려면 아주 좋은 분해능으로 별을 관측해야 한다. 그래서 켁 망원경, 초거대 망원경과 같은 아주 거대한 망원경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은 2000년까지 끈질기게 다양한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그 결과 우리 은하 중심부에서 확인된 별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크게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그리며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의 궤도는 겨우 수 광년 이내 아주 좁은 영역 안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별이 그리는 타원 궤도의 중심에서 딱히 밝은 천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별들은 우리 은하 중심의 중력에 붙잡혀서 궤도를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겐젤과 게즈가 관측한 것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중심부 별들이 돌고 있다는 것은 그 중심에 아주 강한 중력으로 주변 별들을 붙잡은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둘이 추정한 이 무시무시한 중력 덩어리의 질량은 대략 태양 질량의 400만 배 수준이었다. 아주 좁은 영역 안에 너무나 무거운 질량이 높은 밀도로 모여 있어야 했다.
만약 이 정도의 질량의 초거대 별, 또는 성단이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밝은 빛을 봤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밝은 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극도로 높은 밀도로 물질이 모여서 반죽된 미지의 존재, 초거대 질량 블랙홀이었다. 이후 2020년 관측을 통해 우리 은하 중심 블랙홀의 존재를 입증한 둘은 블랙홀 중심의 특이점을 수학적으로 규명한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마찬가지로 은하에 비해 조금 규모가 작은 구상성단 속에 중간 질량 블랙홀이 존재한다면, 겐젤과 게즈가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 존재를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구상성단 한가운데에서 아무 빛도 나오지 않는 허공 주변을 빠르게 맴도는 별들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천문학자들은 이번 연구에서 우리 은하 헤일로를 떠도는 구상성단 중 가장 밝고 무거운 곳으로 유명한 오메가 센타우리 성단을 관측한 허블 우주 망원경의 데이터를 활용했다. 이 성단은 지구에서 약 18만 광년 떨어져 있는데, 수십 광년 범위에 거의 천만 개 가까운 아주 많은 별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다. 아주 맑은 밤하늘이라면 맨눈으로도 볼 수 있다.
이곳은 모태 성단이라기보다는 원래는 좀 더 규모가 큰 왜소은하였던 곳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우리 은하 곁을 맴돌던 왜소은하 하나가 우리 은하의 중력으로 인해 형태가 부서지면서 외곽의 별은 흩어졌고 그 중심에 높은 밀도로 별들이 모여 있던 은하 핵 부분만 남게 된 것이다. 실제로 오메가 센타우리 속 별들의 화학 조성을 비교해보면 굉장히 다양한 화학 조성을 가진 별들이 공존한다. 이것은 여러 세대의 별들이 함께 모여 사는 은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동안 허블 망원경은 벌써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오메가 센타우리 속 별들을 꾸준히 관측했다. 20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이 정도면 성단 중심부를 맴도는 별들의 위치 변화를 충분히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간이다. 천문학자들은 20년에 걸친 허블의 관측 데이터를 통해, 그 속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궤도를 도는 별 일곱 개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이 별들은 정말 엄청난 속도로 성단 속 공간을 누볐다. 성단 속에서 빛나는 별들의 질량만 고려했을 때 계산할 수 있는 성단의 탈출 속도를 일찍이 벗어난 속도였다! 탈출 속도를 넘는 속도라는 것은, 이들이 성단의 중력에 붙잡히지 않은 채 바깥으로 튕겨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분명 이 별들은 성단 바깥으로 튕겨 날아가지 않고 성단 중력에 잘 붙잡혀 있다. 이것은 성단 중심부에 밝은 별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중력이 추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수 광년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범위 안에서!
이를 근거로 천문학자들은 오메가 센타우리 성단 한가운데 질량이 아주 무겁고, 밀도가 아주 높은 질량 덩어리가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질량은 대략 태양 질량의 8200배 수준이다. 정확하게 그동안 우리가 찾고 있던 중간 질량 블랙홀, 미들급 수준에 해당하는 질량이다!
구상성단의 중심부에는 일찍이 진화를 마친 나이 많은 별들이 남긴 항성 질량 블랙홀들이 높은 밀도로 모여 있을 수 있다. 궤도가 비슷하게 겹치는 블랙홀들은 서로 중력을 주고받으면서 결국 더 큰 하나의 블랙홀로 반죽될 수 있다. 이런 일이 성단 중심부에서 아주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면 충분히 태양 질량의 수천~수만 배 수준의 미들급 블랙홀이 존재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게다가 이 과정은 성단 중심부의 항성 질량 블랙홀이 더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을수록 더 빠르게 벌어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중간 질량 블랙홀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항성 질량 블랙홀에서 초거대 질량 블랙홀로 이어지는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서였을 수도 있다. 또 높은 밀도로 별들이 모여 있는 비교적 크지 않은 성단 중심부를 봐야 했기 때문에, 분해능이 좋지 못한 기존의 망원경 관측에서는 중간 질량 블랙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이번 관측을 통해 그동안 아주 가끔씩 보고되었던 중간 질량 블랙홀 후보 천체들에 대한 신빙성도 더 높아지게 되었다. 앞서 천문학자들은 몇몇 왜소은하 중심에서 태양 질량의 2만 배, 10만 배 정도의 질량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중간 질량 블랙홀 후보 천체를 포착한 적이 있다. 물론 그동안 수두룩하게 발견된 항성 질량 블랙홀, 그리고 수많은 은하 중심 초거대 질량 블랙홀들에 비하면 여전히 중간 질량 블랙홀이 발견된 수는 그 후보들까지 모아봤자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직 블랙홀 질량 분포 사이에 텅 비어있는 질량 간극을 완벽하게 채우지는 못한다.
블랙홀의 세계에서는 어중간한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직은 그런 것 같다.
참고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86-024-07511-z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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