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K팝은 대한민국 최고의 수출품이 됐다. 그러나 화려함 뒤에는 그늘도 깊다. K팝의 상징인 아이돌은 이른 나이에 발탁돼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노동권과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다. 데뷔조차 못 한 무수한 연습생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비즈한국은 ‘K팝: 이상한 나라의 아이돌’ 시리즈를 통해 K팝이 성장하는 동안 외면했던 문제점을 짚고, 다각도로 대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K팝을 만드는 이들이 건강해져야 K팝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폭염이 지칠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일요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어느 K팝 학원 앞 대로변에 자동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아직은 대중교통을 혼자 타기 어려운 초등학생 자녀를 태운 부모들의 차량들이다. 서울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국 각지에서 주말 수업을 듣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강원도 화천·경북 울산에서 오는 차량도 있다.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한 사교육 1번가 대치동 학원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곳에 오는 아이들은 유명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아닌 유명 기획사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K팝 춤과 노래를 배운다는 점이다.
아이 손을 잡고 학원 안까지 도착한 부모는 보컬·안무 트레이닝 선생과 인사하고 아이를 들여보냈다. 미리 와서 대기하던 같은 클래스 학부모와 연습실 밖에서 ‘아이돌’과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며 앉아 있다. 인스타, 틱톡 등의 SNS를 활용해 아이들의 챌린지 영상을 찍은 이야기가 주요 대화 소재였다.
#연습생을 목표로 하는 초등학생을 위한 엄격한 트레이닝 과정
5평 남짓한 보컬 연습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원생 넷이 트레이너 근처에 둘러앉아 K팝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 얼굴과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 평균 연령은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이곳에 다니는 원생들 대부분이 초등학생이며 제일 어린 나이는 9살이다. 총 30명이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원생들이 노래를 구절마다 릴레이로 부르면 트레이너가 바로 피드백을 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한 곡을 가지고 수십 번씩 반복하면서 보컬 훈련이 이어진다. 학원 대표이자 보컬 선생은 아이들의 발성부터 입 모양까지 꼼꼼히 살피고 교육했다. 과제를 안 해온 친구들은 칼같이 문제점을 지적받는다. “음 이탈은 괜찮지만 음정을 못 잡는 건 노래를 많이 안 들어서야. 너만 립싱크 녹음을 할 수도 있어. 후렴구가 이 곡에서 중요한 부분인데 팀을 위해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해. 연습영상 꼭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아이돌 연습생을 오래 준비한 경험이 있는 이곳 임프루브 어빌리티(improve ability) 학원 대표는 유독 원생들을 엄격한 편이다. 데뷔를 못 하면 인생 진로가 꼬이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연습생이 되더라도 언제든 방출될 수 있어요. 고등학교까지 준비한 후 일반 대학은 가기 힘들죠. 실용음악·무용도 실기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요.”
보컬 수업을 끝마친 학생들은 잠시 휴식 후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
“왼오왼 오왼오(왼쪽·오른쪽·왼쪽, 오른쪽·왼쪽·오른쪽)” 댄스 트레이너의 큰 소리에 맞춰 원생들이 동선을 맞추고 있다. 거울이 있는 연습실엔 유명 걸그룹 노래가 크게 틀어져 있다. 4명의 원생은 트레이너의 구령에 맞춰 손발을 뻗으며 칼군무를 추고 있다. 아이솔레이션, 왁킹 등 다양한 춤 동작들이 쉴틈없이 펼쳐진다.
트레이너는 예리한 눈빛으로 아이들의 춤을 바라보다 불호령을 내렸다. “제발 알려준대로 해”, ‘다시’라는 말이 수없이 외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단순 동작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구간의 춤을 외울 만큼 훈련은 25분 간 진행됐다. 어려운 춤 동작은 한시간동안 외워야 할 때도 있다. 다음 파트에서 어려운 부분이 나오자 트레이너가 직접 안무를 보여주며 지도한다. 아이들의 이마에는 어느덧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트레이너는 동작이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야 한다고 다독인다. 공연에서 실력을 보여줘야만 연습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 마실 시간도 없이 45분이 흘러갔다.
실제 현역 아이돌과 연습생을 오래 가르쳤다는 이곳의 댄스 트레이너는 “기획사에 가기 위해서 독기를 보여줘야 해요. 원생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댄스를 배우는 것을 일종의 놀이라고 생각하지만 거울을 볼 때 웃음이 나오면 안돼요. 여기서 배우고 있는 원생들이 경쟁 대상은 이미 연습생으로 간 동년배들이에요. 언제든 방출될 수 있는 냉혹한 현실에서 동작 하나하나,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쇼케이스 통해 기획사에 발탁…월말평가 통해 엄격한 피드백
반복된 연습과 지적에도 아이들은 열중하고 있었다. 오는 10월 기획사 관계자들 앞에서 쇼케이스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은 K팝 학원과 원생, 학부모 등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행사다. 이곳에서 눈에 띄는 친구들은 기획사로 직행할수 있다. 학원 입장에서도 원생들을 유명 기획사로 보냈다는 실적을 남길 수 있다. 부모들은 이러한 실적이 많이 쌓이는 학원일수록 더욱 신뢰하고 아이를 맡긴다.
쇼케이스를 준비하는 원생들은 현재 ‘공연반’ 클래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공연반은 제일 인기 많은 반이에요. 석 달 수업에 80만 원 정도입니다. 헤어, 메이크업, 옷, 프로필까지 모두 포함돼 있어요. 학부모들 입소문으로 공연반에 대한 문의가 제일 많아요” 실제 공연반 말고 정규반은 댄스·보컬 수업 각 4회에 수강비는 각 45만 원 수준이다.
학원 대표는 이번 쇼케이스에 기획사 70곳 정도가 주시하고 있다며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큰 공연장을 대관해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쇼케이스를 성공적으로 마친 원생들은 기획사 1차 오디션에 전원 합격했다. 최종합격 후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간 원생도 3명이다. 일반적으로 기획사 연습생 오디션은 최대 4차까지 진행된다. 이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기획사들이 미리 연락해온다고 귀띔했다. “5~6학년 친구들을 기획사들이 제일 선호해요. 보통 원석인 아이들을 먼저 확보하고 싶어하죠.”
원생들은 기획사처럼 이곳에서도 월말평가를 치른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며 보컬·댄스 트레이너와 기획사 관계자들이 실력을 평가한다. 기획사와 트레이너들은 평가서를 부모에게 전달한다. 비즈한국이 입수한 월말평가를 살펴보면 원생의 기본기, 체형 등이 세세히 평가돼 있다.
아이들은 어느 기획사를 가고 싶냐는 질문에 SM, YG, JYP, HYBE 등의 대형 회사로 가고 싶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많은 원생들은 이곳이 첫 학원이 아니었다. 주중에도 학교 끝나고 아이돌 학원을 다니고 있다. 경기도 시흥에서 원생과 함께 온 학부모 김지석(가명)씨는 “학원마다 공개 오디션을 개최하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어요. 아이가 너무 좋아하니까 주중에도 다니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죠.“
※다음 편에는 뉴욕 댄서가 말하는 K팝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전현건 기자
rimsclub@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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