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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와이너리] 그냥 잃기엔 많이 아쉬운 '지하철체'의 유산

두 차례에 걸쳐 현대식으로 변모…부족한 사용성 보완 혹은 아카이빙 계승해야

2024.08.19(Mon) 16:28:53

[비즈한국] 한국인에게 8월 15일이 무슨 날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첫 대답은 ‘광복절’일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날은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 도심 구간이 개통되어 지하철 시대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지하철’은 단순히 전동차와 지하 선로 만을 뜻하지 않는다. 전동차, 선로, 버스 같은 타 교통수단과의 연계성을 고려한 거대한 결합체로, 역사와 그 안에 들어가는 안내 사인 등이 포함된다. 지하철이 들어서면서 탑승객의 흐름을 유도하고 공지사항을 전달할 글자가 필요해졌다. 즉, 지하철 내부에 들어갈 전용 서체가 출현한 것이다.

 

1호선 역 구내에 존재했던 70년대 옛 서체. 사진=츠네오 다케시 촬영

 

가장 먼저 개통된 서울의(수도권 전철) 지하철 서체는 크게 두 번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 1974년 개통 당시에는 ‘표파는곳’, ‘차타는곳’, ‘나가는곳’ 등에 손으로 그어 만든 각진 고딕과 이를 보조하는 좁은 너비의 둥근 고딕이 사용됐다. 통일된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없던 만큼, 장소별로 그때그때 제작 가능한 서체를 사용했는데, 옛 사진을 보면 지상 출입구에 설치된 ‘지하철’ 표지판에는 내부와 달리 글자폭이 좌우로 넓은 고딕이 눈에 띈다.

 

이후 1982년 현대적인 지하철용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등장하면서 많은 시민에게 익숙한 전용 서체인 지하철체가 출현했다. 지하철체의 특징은 모서리를 둥글게 하고, ㅅ과 ㅈ꼴의 끝부분 두께를 좁히는 등의 디자인 요소를 가미했다는 점이다. 이전보다 적용 범위도 늘어났다. 80년대 초까지는 지하철역 입구, 개찰구, 전동차에 쓰이는 서체가 각기 다른 경우가 많았지만, 가이드라인이 정비되면서 대부분 지하철체로 통일됐다. 지하철체의 출현은 공공디자인용 서체가 임기응변식 현장 제작을 벗어나 체계적인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박물관에 전시된 옛 지하철 풍경과 실물 사인 일부. 사진=한동훈 제공

 

8호선 완공까지 수십 년간 큰 변화 없이 쓰이던 지하철체의 위상은 2008년 서울서체가 나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9년 개통된 9호선을 비롯해 리모델링을 마친 많은 역의 글자가 지하철체 대신 서울남산체로 바뀌고 있다. 서울시 관할이 아닌 신분당선에는 여전히 지하철체가 사용되는 등 역마다 다른 양상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지하철체는 점차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1호선 역사 곳곳에 남아있던 70년대 서체도 몇 년 전 리모델링을 거쳐 모두 사라졌다. 이러한 시각 유산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장소로 간 것은 아닌 듯하다. 대책 없이 폐기됐다면 너무나 아까운 일이다. 해당 지자체의 전용 서체로 디자인을 통일하겠다는 전략이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하철이라는 공간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고려한다면 그 공간에 있었던 글자들을 그대로 없애기엔 아쉽다. 외국인들도 아쉬워하는 반응을 여러 번 접했다. 서울로 한정하지 않고 범위를 넓히면 부산, 대구 등 다른 대도시의 옛 지하철 초창기 서체도 보존 가치가 높다. 이를 지킬 수는 없을까?

 

지하철 서체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보존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사진=한동훈 제공

 

서체 디자이너로서 떠오르는 방법은 촬영한 자료를 바탕으로 디지털 폰트를 제작해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오프라인에 그려진 글자를 디지털 폰트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면, 원본 파일이 유실되지 않는 이상 반영구적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원본 디자인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복원하는 수준은 의미가 없다. 조형적인 개선 포인트를 찾거나 새로운 맥락을 녹여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1호선 글자의 경우, ㅅ과 ㅈ꼴에서 양 끝 삐침의 돌출이 과한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부분들을 조정하고 이에 맞는 영문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지하철체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이 폰트의 사용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좌우 글자폭이 현재의 평균 미감보다 넓기 때문이다. 가로쓰기 환경에서 글자폭이 넓으면 한 줄에 넣을 수 있는 텍스트의 양도 적어진다. 이를 조정해 다양한 용도에 대응하고 요즘 감각에 맞출 필요가 있다. 또한, 컴퓨터가 글자 디자인에 활용되지 않던 시절에 그려져 가로세로 두께가 모임꼴마다 들쭉날쭉한 단점이 있으며, 헬베티카로 된 영문 부분도 한글에 맞는 개선 작업이 필요하다.

 

초기 지하철 서체들은 단순한 안내문구가 아니라 당시의 디자인 유산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유산이 무분별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민간 차원에서라도 디지털화 및 아카이빙을 통해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진=한동훈 제공

 

‘메트로 오브 서울’(Metro of Seoul)이라는, 1기 서울 지하철 건설 당시 설치된 타일 벽화를 아카이빙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이는 2021년 ‘서울의 지하철’​이라는 단행본으로 결실을 맺기도 했다. 지자체의 공식 보존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이처럼 민간 차원의 아카이빙과 계승도 가능하다. 지하철 문화 50년이라는 긴 역사를 마주하면서 이제 우리도 디자인 유산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두지 말고, 남길 수 있는 여러 방안을 고민해볼 때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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