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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비법] 패소의 아픔, 3년 후 '뒤늦은 옳음'으로 바뀌었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주장이 수년 뒤 인정받기도…'상생' 표방한 대기업의 중소상공인 죽이기 최근 제재 받아

2024.08.19(Mon) 13:54:26

[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알쓸비법)’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과거에 법원 판결에서 배척된 주장이 수년이 지나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 처분에서 인용되는 사례도 있다.

 

변호사 일을 하다 보면 승소하는 경우도 있고 패소하는 경우도 있다. 패소는 변호사로선 숙명이며, 그것이 두렵다면 변호사를 할 수 없다. 승소율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승소율이 너무 높으면 이길 만한 사건만 맡는다거나 사건 수임의 의지가 없다는 것이고, 승소율이 너무 낮으면 업무 수행의 능력 측면에서 돌아볼 점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패소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전장에선 늘 있는 일)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의뢰인이 패소하는 것이지 대리인이 패소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와 같이 스스로를 위로해도 패소는 당황스럽고 쓰라린 경험이다. 패소한 기억이 사라지면 좋겠지만, 기억이 떠올라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런데 사건을 맡았을 땐 패소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때 주장이 맞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내가 옳았다는 생각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여기면서도 너무 늦었다는 ‘만시지탄(晚時之歎)’이라는 생각도 든다.

 

장황하게 패소에 대한 감정을 밝힌 이유는 2021년 법원 판결에서 배척된 주장이, 수년이 지난 지금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처분에서 인용된 것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정위의 8월 13일 자 ‘대규모 부당 인력지원행위 제재’에 관한 보도자료에서다. 대기업 계열 A 사가 식자재 유통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대기업이 진출하지 않았던 중소상공인 위주의 지역 식자재 유통시장을 신속하게 선점한 뒤, 다른 대기업 경쟁사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진입장벽을 구축했다는 내용이다.

 

지역 식자재 유통 사업은 대기업이 이익을 내기 어려운 사업이다. 거래 단위가 작고, 거래처(주로 요식업체)의 부도·폐업이 잦아 채권 회수도 어려우며, 다양한 품목을 매일 배송해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가는 사업이라 대기업 인력구조나 급여체계로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 새벽에 동네 곳곳의 식당에 방문해 문 앞에 식자재를 배달하는 사업을 생각하면 된다.

 

이런 사업은 유통망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고, 영업사원과 거래처 간 끈끈한 유대관계에 의해 유통망이 형성되는 경향이 있어 한 번 완성된 유통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식자재 유통 사업은 수익을 내기는 어려우나, 발품을 열심히 팔면 간신히 사업체를 유지할 수는 있다.

 

일반 대기업은 이런 구조의 식자재 유통시장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여러 계열사를 통해 식자재 품목별로 1위 업체를 거느린 A 사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식자재 유통시장에서 이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일단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유리했다. 계열사인 식자재 제조업체들이 안정적인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고, 다른 식자재 제조업체를 유통시장에서 배제할 수 있어 그룹에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자재 유통시장은 시장 내 절대다수(약 85% 이상)를 중소상인이 차지하고 있어 대기업 진출 시 ‘골목상권 침해’라는 이슈가 제기되는 문제가 있었다. A 사는 시장에 직접 또는 단독으로 진출 시 예상되는 중소상공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대외적으로는 이들과의 상생을 표방하며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지역 식자재 시장에 진출했다.

 

지금도 A 사가 지역 중소상인과 합작법인을 설립하면서 상생을 표방한 언론보도가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중소 협력업체와 상생협력 아카데미’, ‘상생 바탕 두 자릿수 이상 성장’, ‘상생 콘셉트 계열사’ 등의 표제를 단 홍보성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B 그룹 계열사인 A 대기업은 지역 식자재 유통시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중소상인과의 상생을 대외적인 명분으로 내걸고, 실제로는 중소상공인을 리스크로 여겼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다. 사진=박정훈 기자


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의 생리, 대기업 본사가 지역 중소상인을 바라보는 시각 등을 감안할 때 정말 상생의 목적으로 합작법인을 설립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점에 관해 지적한 공정위 보도자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러한 방식(합작법인 설립)은 상생 이슈를 회피하기 위한 대외적 명분이었을 뿐 중소상공인들과 장기적·지속적인 상생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합작 계약은 A 사가 지정하는 중소상공인들이 합작법인을 설립한 이후 A 사가 지분을 매입해 합작법인을 장악하는 내용이었다. 중소상공인을 상생의 대상이 아닌 장애물 및 사업 리스크로 인식한 결과 A 사의 모기업인 B 그룹까지 개입해 이들을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퇴출시켰다.

 

· A 사가 내부적으로 중소상공인들을 조직적으로 퇴출시켜 나가는 동안 합작법인은 이 사건 인력 지원을 바탕으로 시장에 원활히 안착하고 유력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원은 합작법인에 대규모 부실이 발생한 시점까지 계속돼 합작법인의 시장 퇴출을 저지·지연시켰고, 그 결과 합작 계약 과정에서 합작법인은 중소상공인들로부터 확보한 영업망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 (전략)합작법인은 중소상공인 위주의 시장에서 유력한 지위를 획득했고, 시장 퇴출도 인위적으로 방지돼 중소상공인이 본래 획득했을 정당한 이익을 대기업이 잠식하는 결과까지 초래됐다.

 

보도자료 내용은 공문서 특유의 무미건조한 톤으로 작성돼 감정적으로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사건을 수임하면서 A 사 직원의 태도와 발언을 경험한 바로는, 위 내용은 처절하고 살벌한 현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편이다. B 그룹은 중소상공인을 장애물이나 사업 리스크, ‘암세포’ 정도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중소상공인을 퇴출시켰다. 그 과정에서 신용불량, 국세 체납, 무자료 거래 등 비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형사고소도 불사했다.

 

그뿐만 아니다. 영업권과 지분 인수의 대가를 산정하는 계산식을 교묘하게 설정해 매출이 감소했을 경우 중소상공인이 A 사로부터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 사에 손해배상을 하도록 했다. 이를 볼모로 영업권과 지분을 손쉽게 넘겨받았다. 중소상공인은 합작법인에 파견된 A 사 직원을 동업자로 생각했지만, 직원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면서 경영상 실수가 있는지 탈탈 털고 있었던 것이 실상이었다.

 

A 사가 지방의 1위 식자재 업체를 선정해 합작법인을 설립했으므로 합작법인은 우량한 업체일 수밖에 없었다. 재밌는 건 본격적으로 사업을 개시해 B 그룹의 제품만을 취급하고 A 사의 전산, 물류를 이용한 이후에는 전국 합작법인의 수익이 하나같이 악화했다는 점이다.

 

이는 A사가 합작법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식품 제조 계열사의 이익을 도모했거나, 아니면 B 그룹의 경영방식이 낙제점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A 사는 이러한 배경은 무시한 채 매출이 감소했다며 합작법인의 동업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계약상 문건이 중요한 민사소송에서는 위와 같은 A 사와 B 그룹의 경영전략이나 퇴출 의도 등이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시장의 구조 및 현황을 중시하는 공정위 절차에서는 앞선 사정이 반영돼 A 사에 제재가 내려졌다. 이 점이 바로 시장의 공정한 질서를 지키는 공정거래법의 특징이지만 조치가 너무 늦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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