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K팝은 대한민국 최고의 수출품이 됐다. 그러나 화려함 뒤에는 그늘도 깊다. K팝의 상징인 아이돌은 이른 나이에 발탁돼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노동권과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다. 데뷔조차 못 한 무수한 연습생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비즈한국은 ‘K팝: 이상한 나라의 아이돌’ 시리즈를 통해 K팝이 성장하는 동안 외면했던 문제점을 짚고, 다각도로 대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K팝을 만드는 이들이 건강해져야 K팝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여자 연습생 10명 중 8명은 생리를 안 해요.” 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 관계자의 말이다.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새벽 2시에 귀가하는 삶. 다이어트를 위해 일주일 동안 물만 마시는 ‘아이들’이 엔터테인먼트 왕국에는 넘쳐난다.
“대부분은 생리를 안 하죠. 한창 자랄 시기에 안 먹고 운동만 하니까요. ‘건강하게’ 다이어트하는 시스템은 여기에 없습니다. 무조건 목표 지점을 달성하라고 시키죠. 생리를 안 하면 아이들은 오히려 좋아합니다. 편하니까요. 학교를 안 가는 어린 여자아이들은 생리를 안 한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성교육을 해주지는 않거든요.” 이 관계자는 전했다.
“전날보다 몸무게가 조금이라도 많이 나오면 집에 갈 수 없었어요. 목표 몸무게가 될 때까지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벌을 서야 했습니다. 이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만 먹어도 입원해야 할 지경이었죠. 장염을 달고 살았습니다.” 7년간 연습생이었던 가은(가명)도 이렇게 회상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넘쳐나지만, 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없다. 이 왕국은 학교도, 회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돌봄의 의무가 없다.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 연습생은 회사와 ‘고용’관계도 아니다. 연습도 시키고 벌도 주지만, 노동법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걸그룹 브레이브걸스 멤버였던 노혜란 씨를 만나 아이돌과 연습생 생활의 일면을 들었다.
#하혈만 세 달…일주일에 한 번은 응급실
혜란은 힙합을 좋아했다. ‘아이돌’이라는 개념도 자리 잡지 않은 시기였다. ‘보아’를 보면서 춤과 노래를 하는 퍼포먼스 가수의 꿈을 키웠다.
운도 좋았다. 오디션을 몇 번 보지 않고서 ‘합격’했다. 업계에선 제법 대우가 좋다는 평이 난 회사였다. 다른 회사 연습생에게 부러움도 샀다.
15살. 방과후 매일 새벽까지 연습했다. 밤을 새우고 학교를 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연습생 혜란의 일과였다. 연습시간을 늘리려고 회사 근처 고시원에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좁은 방 한 칸에서 꿈을 키웠다. “연습 시간도 꿈꾸는 시간이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보고 달려가는 가장 재미있었던 시간이었죠”.
그렇게 3년 반의 시간을 보냈다. 19살, 드디어 ‘데뷔’의 기회가 주어졌다. 170cm의 혜란은 매일 체중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 젖살도 카메라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다이어트’가 실력보다 더 앞섰다. 스케줄도 만만치 않았다. 바쁜 시기에는 오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일정이 있었다.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단 2시간뿐이었다.
몸무게를 재고, 다이어트를 하고, 하루 8시간씩 운동을 했다. 10일 동안 음식은커녕 물조차 마시지 않은 적도 있다. 물을 삼키지 않고 한 모금 머금은 뒤 뱉고, 또 머금은 뒤 뱉었다. 그렇게 버텼다.
결국 몸이 망가졌다. 위경련이 심해지고, 일주일에 한 번은 응급실에 실려 갔다. 가만히 있어도 식은땀이 났다. 데뷔 후에는 생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세 달 내내 하혈이 이어지기도 했다.
몸이 아파도 다이어트는 계속됐다.
“업계 자체가 그런 분위기인 거죠. ‘너는 몸이 약간 부해 보이니 볼륨감을 키워서 날씬해 보이게 해봐라’, 이런 말이 일상적이에요. 장염이 걸리면, 살 빠지니까 잘됐다고 해요. 여기서 유행하는 다이어트약이 있어요. 이걸 먹으면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갑니다. 그래도 무조건 먹는 거죠. 저도 자발적으로 몇 달 동안 먹은 적이 있어요. 일단 몸무게를 맞춰야 하니까. 이걸 먹고 간질까지 온 친구도 있었어요”.
조금만 먹어도 목에 염증이 생겼다. 죽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목 인대를 다쳤다. 그래도 행사는 서야 했다. 다친 채 높은 하이힐을 계속 신고 춤을 추자 발목이 버티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들과 사이가 좋았어도 이 생활을 하다 보면 관계가 망가져요. 다이어트 해야 하니까 밥도 못 먹지, 바깥에도 못 나가지. 하고 싶은 노래도 못 하고. 10~20대 초반 아이들이 휴대폰 없이 한 공간에서 24시간 붙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왔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 먼 거죠”.
#솔로 아티스트로 도약…무엇이 달랐나
그렇게 아프다 7년 계약기간이 끝난 뒤 혜란은 그룹을 나왔다. 난생처음 돈을 벌었다. 치킨집 매니저부터 브랜딩, 백화점 판매까지. 혜란의 인생에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처음에는 너무 재밌었죠. 그래도 (가수 일이)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는 계속하고 싶은데 그만두게 된 경우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가수와 가장 가까운 접점에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연출부터 뮤직비디오 조감독까지. 결국 혜란은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소속사가 없고, 아이돌이 아니어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녹음실 대여부터 스타일링까지 모두 ‘자비’가 들어갔다.
“꿈을 꾸기에 두려운 자신에게
용기있게 꿈을 꾸는 너에게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기를”
혜란은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앨범에 담았다. “이 프로젝트를 꼭 성공하고 싶어요. ‘네가 꿈을 놓는 순간 꿈이 끝난 거지, 네가 놓지 않으면 꿈은 끝난 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음악이 하고 싶어 아이돌이 됐지만, 이전의 혜란은 하고 싶은 음악을 하지 못했다. 춤도 마찬가지였다. 혜란의 의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티스트라고 말은 하지만, 시키는 일만 했죠.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춤도 노래도 모두 제가 결정합니다. 이제 제 삶을 제가 선택해서 살 수 있다는 것에 정신적인 자유를 느끼고 있습니다. 매일 달고 살던 위장염도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어요”.
“단순히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을 뿐인데, 앨범을 제작하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제가 하나하나 모든 과정에 다 참여했는데, 느끼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이 일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큰돈이 들어가는 하이리스크 사업이에요. 그런 분들이 없었으면 아이돌이 만들어질 수 없었죠. 한편으로는 이렇게 폐쇄적이고 압박이 강하기 때문에 성과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혜란은 아이돌 육성 시스템이 공식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제가 겪은 문제는 저희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희 소속사는 업계에는 대우나 평판이 좋은 편이었어요. 문제는 공인된 시스템 자체가 없다는 거죠. 대형 기획사에서도 숙소에 들어오지 않으면 벌금 1000만 원을 내게 하거나 벌을 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이돌 생활을 할 때는 ‘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모든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차단했어요. 주변에서 문제 제기를 하더라도, 저 스스로 생각을 원천 차단한 거죠. 저는 이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본인이 느꼈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더 나은 시스템이 정착되어, 더 많은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음악을 만들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대중의 인식도 많이 바뀌고, 업계에서도 좋은 방향으로 선도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아티스트의 마음을 이해하고 좋은 방향으로 풀어나가려는 분들이 현업에 있는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즐기는 문화가 아이돌의 곪은 문화가 아닌 정신적 자유와 창작에서 오길 바랍니다.”
※다음 편에는 단발머리 전 멤버 허유정 소우주컴퍼니 대표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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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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