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돌풍’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돌풍’은 어느 진영에 더 뼈아플까? 흔히 우리나라 정치 진영을 진보와 보수(혹은 좌와 우)로 구분하지만, 사실상 많은 국민에겐 어느 정당과 정치인이든 그 나물에 그 밥,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돌풍’에서 여당과 야당, 대통령을 비롯 수많은 정치인들을 그리는 방식도 우리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돌풍’은 어느 진영이고 뼈아플 만큼 휘몰아치는 ‘모두까기’를 선보이며 우리를 돌풍(突風)처럼 휘젓는다.
‘돌풍’은 시작부터 휘몰아친다. 긴급체포를 몇 시간 앞둔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가 청와대를 찾는다. 그에게 누명을 씌워 내치려는 이는 현직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으로, 10년 전부터 함께 정경유착을 끊고 재벌개혁을 하겠다며 같은 품을 품은 동지이자 스승 같은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를 박동호는 세상을 뒤엎겠다는 명분으로 시해를 결심하고 대통령이 피우는 전자담배액을 바꿔치기해 쓰러뜨리는데 성공한다. 박동호가 그에게 국무총리라는 옷을 입혀준 대통령 장일준의 시해를 시도하고, 장일준의 정치적 적자로 여겨지는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이 그런 박동호를 사사건건 막아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장일준은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을 만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상징이었으나 아들 장현수(박정표)의 사모펀드 비리 때문에 대진그룹과 손을 잡았고, 정수진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문화선전국장 출신으로 민주사회를 꿈꿨던 열혈 운동권이었으나 전대협 의장 출신 남편 한민호(이해영)가 재벌과 결탁한 사실을 덮고자 신념을 버렸다. 한 배를 탔던 동지들의 발목을 잡거나 타락하는 결정적 이유가 가족이란 점은 씁쓸하면서도 익숙한 설정이다.
대통령 유고 시 국무총리가 그 권한을 대행한다는 것에 착안해 시해를 결심한 박동호. 그러나 자꾸 변수가 생긴다. 대통령은 쓰러졌으나 아직 숨이 붙어 있고, 정수진은 권한대행이 된 박동호를 옭아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온갖 거래와 협잡과 암투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그에 맞서는 박동호 역시 정공법을 구사하는 건 아니다.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 그는, 저쪽에서 한 발 쏘면 다시 이쪽에서 두 발을 쏘고, 저쪽에서 대포를 쏘면 이쪽에서 미사일을 쏘는 식으로 상대보다 한 걸음 더 나가는 방법으로 대응한다. 이미 이 판은 모두 목숨을 내걸고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쓰러진 대통령이 깨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박동호는 한 달이면 세상을 뒤엎을 시간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국정원과 검찰과 경찰을 장악하는 데 일주일, 대통령 아들 장현수를 파헤치는 데 일주일, 대진그룹과 정수진의 멱을 잡는 데 일주일, 그리고 쓰레기를 모아 세상 밖으로 버리는 데 일주일. 그러나 정치란 건 정수진의 말마따나 산수가 아니라 수학의 영역. 변수도 있고, 상대가 모르는 미지수도 등장한다. 서로를 제거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백척간두에 놓인 건 박동호와 정수진이지만 그 주변의 적과 파트너들 또한 누구 하나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내뿜으며 상황을 이리저리 변화시킨다.
박동호의 파트너가 되기로 결심한 청와대 비서실장 최연숙(김미숙), 정수진과 결탁한 대진그룹 부회장 강상운(김영민), 박동호의 친구인 이상주의자 검사 이장석(전배수), 오랜 정치 경력만큼이나 꼬리가 많은 여당 거물 국회의원 박창식(김종구), 태극기 부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공안 검사 출신 야당 대표 조상천(장광), 아들보다 그룹이 소중한 대진그룹 강 회장(박근형), 비밀을 숨기고 있는 장일준 대통령의 부인 유정미(오민애), 박동호의 수행비서 서정연(임세미)과 정수진의 수행비서 이만길(강상원) 등 박동호와 정수진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신념 혹은 권력욕 혹은 명예 등을 추구하며 상황에 따라 결탁하고 갈라서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구 하나 자신의 이야기가 없지 않지만 특히 돋보이는 건 정수진과 과거부터 악연이 있는 야당 대표 조상천.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정수진과 과거 그를 물고문했던 공안 검사 출신 조상천이 어떤 목표를 위해 반목하고 때론 야합하는지 지켜보면서 전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돌풍’은 거듭되는 위기와 반전을 거침없는 전개 속도로 선보이며 몰입감을 극대화하면서, 그 안에 우리 정치사의 질곡을 꾹꾹 눌러 담는다. 대통령 시해부터 여당과 야당의 소모적인 중상모략과 흑색선전, 어느 곳이고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조작과 매수, 탄핵 소추, 정치적 메시지로 발화하는 죽음 등 실존 인물 및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한두 포인트가 아니다. 주인공 박동호와 그에 대응하는 빌런 포지션의 정수진이 있지만, 누구 하나 마음을 둘 수 없다는 점이 특징.
‘추적자 THE CHASER’ ‘황금의 제국’ ‘펀치’ 등 ‘권력 3부작’으로 호평 받았던 박경수 작가는 다면적인 인간의 면모와 그들의 이합집산을 제대로 보여준 바 있는데 그런 그의 장기는 ‘돌풍’에서 신명나게 춤춘다. 그는 ‘돌풍’을 ‘박동호의 위험한 신념과 정수진의 타락한 신념이 정면으로 충돌해 대한민국 정치판을 무대로 펼치는 활극’이라고 소개했는데, 박동호의 위험한 신념 역시 온전히 지지받을 수 없단 점에서 그간 그가 보여왔던 피카레스크(주요 등장인물들을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으로 설정해 이야기를 이끄는 것)물의 연장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12부작으로 편당 45분가량인 ‘돌풍’은 손에 땀을 쥐듯 몰아보기 좋다. 뒤로 갈수록 비슷한 패턴이 이어지는 감이 있고, 몰카와 녹취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듯한 아쉬움도 남지만, 결말까지 흐지부지 않고 내달리는 쾌감과 현재의 정치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공교롭게도 현재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에 관한 청원의 동의 수가 100만 명을 돌파해 있고,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으며, 언제나 그랬듯이 여당과 야당의 소모적이고 비협조적인 정쟁이 이어지는지라 ‘돌풍’을 보는 시선이 여느 때의 픽션 드라마 보듯 느긋한 심정보단 쫄깃한 심정이다.
도파민이 넘치지만 곱씹을 요소가 충분하니 시청을 권한다. 그나저나 정치하려면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윤희가 원한 신랑감처럼) 고아 출신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 생각도 드네? ‘돌풍’ 속 인물들도 그렇고, 지금껏 정치사에 얽혔던 가족의 사례를 봐도 그렇고.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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