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2일 베를린에서 약 40분 떨어진 작은 휴양도시 바트 자로우(Bad Saarow)에서 동독경제포럼 24(Ostdeutsches Wirtschaftsforum, OWF 24)가 열렸다. 독일은 통일된 지 3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옛 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의 경제 격차를 없애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대세(Solidaritätsteuer)’다. 통일 이후부터 꾸준히 세금을 거둬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한 동독 지역을 개발하는 다양한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OWF는 동독 경제를 부흥한다는 목표 아래 매년 관련 업계 인사들이 모여 연결되는 자리다. 동독 경제에 필요한 여러 사회적 과제를 한자리에 모아 현황을 점검하고, 쟁점을 토론하고, 동독 기업을 초청·홍보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계기로 시작되어 18년째 이어졌다. OWF는 매년 독일의 총리와 경제부 장관이 기조연설에 나와 국가적인 수준에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기관은 독일 경제기후에너지부로 특히 그 산하기관이자 경제 무역 진흥기관인 GTAI(German Trade and Investment)에서 동독 분야의 경제 진흥을 담당하는 부서가 담당한다. 이 부서는 신연방주/구조 전환(Neue Bundesländer/Strukturwandel)부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동독 지역을 ‘신연방주’로 지칭하며, 서독 지역에 몰려 있는 기업을 분산하고 경제 발전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한다.
OWF2024에서는 ‘동독 지역 혁신 동력으로서의 딥테크 스타트업’이 큰 화두 중 하나였다. 동독 지역은 전통적으로 기술 중심 대학과 연구기관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훌륭한 교육 및 연구기관에서 양성된 학자들이 연구 주제를 산업으로 확대해 기업을 창업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동독의 혁신 경제를 이끌어 가는 이들 딥테크 스타트업을 어떻게 국가적으로 지원할지를 두고 다양한 토론이 이어졌다.
필자도 참여해 ‘딥테크 스타트업의 국제화’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동독 지역 딥테크 스타트업이 한국과 아시아에 진출할 기회를 소개했다. 특히 독일과 한국 사이에 다리를 놓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독 딥테크 스타트업과 한국 간의 교류 기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필자뿐 아니라 GTAI의 글로벌 담당자 필립 쾨브너(Philip Kövner), 튀링엔주 예나대학교 국제 스타트업 캠퍼스(International Startup Campus) 팀장 발레리 달드룹(Valerie Daldrup) 등 공공기관과 연구소 관계자뿐만 아니라 동독 출신 대기업인 자이스그룹(ZEISS Group), 동독 딥테크 스타트업인 로부스트 AO(ROBUST AO GmbH) 대표, 퀀텀 옵틱스 예나(Quantum Optics Jena GmbH) 대표 등 유망한 동독 딥테크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모여 함께 의견을 나눈 값진 자리였다.
분단국가로서 한국도 통일 후 지역별 경제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처럼 깊은 노력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 자리는 독일의 딥테크 스타트업 신을 이해하려는 것이자 한국이 언젠가 겪을 미래를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가 이 포럼에서 나눈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와 공명할 수 있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관해서 얘기해보겠다.
Q. 한국과 독일(특히 동독) 스타트업의 마인드 셋이 어떻게 다른가. 한국과 독일 스타트업이 함께 일한다면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A. 딥테크 스타트업 신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독일과 한국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선 흥미로운 수치부터 살펴보자. 한국 딥테크 스타트업 창업자의 평균 연령은 47세, 평균 직업 경력은 14년이다. 창업자들은 이미 평균 1.76개의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창업 당시 77%가 기업에서 16.4%가 연구소 및 대학에서 창업했다. 한국 스타트업 신에 그만큼 경험 많은 성숙한(mature) 창업자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딥테크 스타트업 약 71%가 이공계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동독의 딥테크 스타트업 대부분이 연구소에서 창업한다는 것과는 뚜렷하게 비교되는 대목이다. 자연스레 마인드 셋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딥테크 스타트업은 빠르고 유연하다. 이미 직업적으로 경험이 많은 창업자들은 더 늦기 전에 자기의 비즈니스를 키우고 싶어한다. 반면 연구자 출신이 많은 독일의 스타트업은 기술에 더욱 강점을 갖고, 천천히 가더라도 기술을 성숙시킬 수 있도록 기업, 타 연구소 등과의 협업에 매우 열려 있다. 특히 유럽은 세계 최대의 R&D 지원 기금 중 하나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독일의 딥테크 스타트업도 이의 수혜자다. 한국 창업자들의 사업적 경험과 독일 창업자들의 기술적 완성도, 독일 지역의 풍부한 R&D 자금 등을 고려한다면 둘의 협력은 매우 큰 시너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Q. 동독과 한국의 딥테크 스타트업 생태계가 서로 잘 협력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한국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 유럽 및 독일의 딥테크 스타트업에 투자한 사례가 있는가.
A. 한국과 독일이 특히 시너지를 낼 만한 분야로 모빌리티, 스마트 시티, 인공지능, 첨단 소재, 로봇 공학, 헬스 테크, 재생 에너지 등의 분야를 눈여겨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미 베를린에서 CVC 및 오픈 이노베이션 조직인 현대 크래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유럽 스타트업에 활발히 투자하고 있다.
미국에 기반을 둔 LG 테크놀로지 벤처스는 7억 1000만 유로(1조 5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운용한다. 미국 기반이지만 전 세계 혁신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에 고루 투자하기 때문에 유럽뿐만 아니라 독일 스타트업도 LG의 잠재 협력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지난해 뮌헨에서 열린 세계적인 자동차 박람회 IAA 모빌리티에서는 LG전자 CEO가 기조연설을 통해 LG가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선두 주자가 되겠다고 공표했다. 전통적으로 자동차 산업이 주력 산업 중 하나인 독일이 주목할 만한 포인트다.
한국 대기업에서 삼성을 빼놓을 수 없는데, 특히 동독 딥테크 스타트업의 경우 삼성 카탈리스트 펀드의 투자 영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성은 클라우드, 인공지능(AI), 5G, 자율 시스템, 센서, 양자 컴퓨팅 등의 분야에 투자하는데,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삼성의 사업 내용과 연결되는 영역에서 혁신 기업과 협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대기업 외에도 한국의 중소·중견 기업들도 향후 신사업 확장을 위해 유럽의 혁신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있다. 특히 이미 유럽에 공장을 두고 유럽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공장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스마트 제조, 물류 등의 분야에서 혁신적인 솔루션을 보유한 유럽 스타트업을 찾고 있다.
Q. 한국에서 성공한 독일 딥테크 스타트업의 사례가 있나. 동독의 딥테크 스타트업이 한국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문화적 차이에 어떻게 대비할 수 있는가.
A. 2017년 베를린에서 설립돼 2022년 인피니온(Infinion)에 인수된 인더스트리얼 애널리틱스(Industrial Analytics)가 좋은 예다. 인더스트리얼 애널리틱스는 2021년 한국 중소벤처기업부의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리차드 뷔소(Richard Büssow) 공동 CEO는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한국이 얼리어답터이자 세계 9위 에너지 소비국으로서 아시아의 관문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 프로그램은 한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글로벌 스타트업에 다양한 지원을 제공한다. 약 6주간의 한국 현지 프로그램을 통해 임시 사무실을 제공하고, 경험 많은 한국 액셀러레이터와 연결해 현지화에 대한 멘토링을 받을 수 있다. 또 한국에서 사업을 준비하면서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문제에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현지 인턴 및 매니저의 지원을 통해 제품에 대한 피드백도 받을 수 있다. 해외 스타트업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장 출시 때 겪을 리스크를 줄이고, 사전 정보를 얻어 한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인더스트리얼 애널리틱스는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시장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현지 파트너도 찾았다.
한국 정부는 2024년부터 2027년까지 13억 유로 이상을 투자하는 스타트업 코리아 펀드를 조성해 글로벌 스타트업에 지원할 계획이다. 한국과 아시아에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하는 글로벌 스타트업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 스타트업이 한국에서 느끼는 가장 큰 문화적 차이는 속도일 것이다. 휴가가 많고, 일 속도가 느린 유럽의 문화는 한국 현지에서는 풀어야 할 큰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자본이 한정되어 있으면서 빠르게 성장하고자 하는 스타트업에게는 오히려 ‘빨리빨리’ 문화를 가진 한국이 최적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소비자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매우 개방적이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제공하기 때문에 유럽 스타트업이 제품을 테스트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갖고 있다.
뮌헨,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등 잘 알려진 서독 도시에 비해서 에어푸르트, 예나, 일메나우 같은 동독 도시는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국제적인 확장보다는 다소 폐쇄적이었던 동독 지역에도 아시아와 한국은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동독에는 60여 개 대학이 있다. 그 중 15개가 공과·기술대학교다. 동독 지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고 기업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다양한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특히 베를린과 뮌헨의 중간에 위치한 동독의 튀링엔주는 독일 중앙에 위치헤 입지가 매우 훌륭하다. 동유럽 지역과 가까워 낮은 비용으로 인재들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독일에게 한국의 딥테크 스타트업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 기업이 유럽에 진출하는 것만이 글로벌 진출은 아닐 것이다. 유럽 기업이 한국에 진입, 협업해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도 글로벌 진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기업과 시장의 장점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협력할 기회를 모색하면서 함께 혁신을 일궈나가는 것이 기업과 스타트업, 정부, 대학 연구기관 등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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