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알쓸비법)’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줬으나 이를 돌려받지 못했다면, 돈을 빌려 간 사람을 피고로 지정해 대여금 청구 소송, 즉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법률관계를 보면 돈을 빌려준 사람 입장에선 돈을 ‘대여’한 것이고, 돈을 빌린 사람은 돈을 ‘차용’한 것이다. 보통은 돈을 빌려준 사람이 소송을 제기하므로, 민사소송의 사건명은 ‘대여금 청구 소송’으로 정해진다.
상담하다 보면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 어떠한 주장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자료를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지 문의를 자주 받는다.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일종의 계약인데, 민법에선 이를 소비대차계약이라고 부른다.
소비대차계약은 원금·변제기·이자 여부 및 요율 등의 조건에 대해 당사자 간의 합의만 있으면 성립하고, 특별한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비대차계약을 체결한 사실, 돈을 준 사실, 변제기가 도래한 사실 등을 모두 주장하거나 입증하면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 충분히 청구인용 판결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하기 쉬운 점이 있다. 내가 남에게 돈을 주었다는 사실과, 대여(반환) 약정은 별개다. 즉 남에게 돈을 준 명목이 반환을 예정한 대여일 수 있지만, 증여·투자·수수료 등일 수도 있다. 증여로 돈을 줬다면 당연히 돈을 돌려받지 못한다. 또한 투자를 돈을 줬다면 해당 기업체의 지분을 취득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 따라서 단순히 돈이 입금된 사실만을 입증하는 계좌이체 내역, 입금증 등의 자료만으로는 대여 약정 또는 소비대차계약을 입증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일반적으로 남에게 돈을 빌려 줄 때에는 차용증 등을 작성한다. 차용증에는 예를 들어 ‘을은 차용증 작성일 현재 갑으로부터 1000만 원을 차용했고, 위 차용일로부터 6개월이 되는 날 갑에게 위 원금 및 이에 대해 연이율 10%로 계산한 이자를 반환하기로 한다’는 식의 문구가 기재된다. 법원은 차용증을 작성했다면 그 성립을 부정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차용증 내용대로 소비대차계약의 성립을 인정한다.
문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차용증을 작성하지 않은 채 돈을 빌려준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또는 호의로 돈을 주고받았다가, 시간이 지난 후 생각이 달라진 원고가 갑자기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상식적으로 수천 만 원을 남에게 줬다면, 그 액수에 비춰 당연히 나중에 돈을 돌려받기로 하는 약속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반대로 돈을 빌려줬다면 차용증을 작성할 텐데, 차용증을 쓰지 않았다는 건 ‘증여의 의사로 돈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처럼 차용증 없이 소비대차 또는 금전 대여를 전제로 돈을 돌려 달라는 사건이 많은데, 사람마다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 누구 손을 들어줄지 참으로 난감하다.
민사소송에서 권리를 발생시키는 요건을 구성하는 사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증명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돈을 돌려 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비대차계약 또는 금전 대여 약정을 입증해야 한다. 차용증이 있다면 차용증을 제출하는 것만으로 소비대차계약은 쉽게 입증이 된다. 차용증이 없다면, 소비대차계약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여러 다양한 사정을 모두 정리해 제출하는 방법밖에 없다.
법원은 “민사소송에서 사실의 증명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경험칙에 비춰 모든 증거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어떠한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할 수 있는 고도의 개연성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그 판정은 통상인이라면 의심을 품지 않을 정도일 것이 필요하다”라고 판시했다.
이처럼 민사소송에서 입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을 요구하므로, 정황증거나 간접증거로 소비대차계약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열심히 준비하면 입증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차용증 없는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 소비대차계약을 입증하기 위해 흔히 거론되는 사정은 다음과 같다.
대부업자거나 기존에 금전 대여 등의 거래관계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차용증 없이 돈을 줬더라도 그 돈은 대여금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친척·친구 등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수록(특히 연인관계), 돈의 액수가 소액일수록 증여로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경조사 등을 계기로 돈을 줬다면 이는 돌려받을 생각이 없는 축의금·부의금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높다.
돈을 준 사람이 문자·카톡·전화 등으로 사소하게라도 “돈 왜 안 돌려주세요?” “언제 주실 거예요?” “정리해 주세요” 등의 독촉을 했다면, 이는 원고에게 유리한 간접사실이 될 수 있다. 다만 피고가 “맥락에 안 맞는 말이어서 굳이 반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거나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었을 뿐, 맞는 말이라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으로 대여 사실을 반박할 수도 있다.
실무적으로 차용증이 없다면 돈을 빌려주는 장면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을 상대로 증인신문을 함으로써 대여 사실을 입증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증인이 원고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기대하기 어렵거나, 위증의 벌을 감수하고 증언하는 것을 회피하면서 원고의 부탁을 받고 피고의 반대신문이 불가능한 사실확인서만을 제출했다면, 그러한 사람의 진술에 대해서는 증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 차용증이 없는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는 청구를 방어하는 피고가 유리하다. 그런데 피고가 대여 사실을 부정하면서 증여·투자 등 다른 명목을 내세웠다가 그 명목이 사실과 맞지 않다는 점이 밝혀지면, 민법상 일반원칙과 별개로 법정에서 피고가 불리한 입장에 처해질 수 있다.
소송은 유기체와 같아서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 결과를 예상하기 어렵다. 법리나 사실관계는 유리한 지위에 있었지만 사소한 거짓말로 신뢰를 잃어 패소하거나, 상대방 주장에 대꾸하지 않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불리한 판단을 받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법정에 출석하는 사람이 법관은 물론 상대방에게도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는 남을 위해서라기보단 혹시라도 모를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재판도 사람이 하는 것인데 당사자의 관계나 전후 맥락을 봤을 때 돈을 빌려준 것이 분명한데도 단지 차용증이 없다는 점 하나만으로 갚을 의무가 없다고 우긴다면(또는 우긴다는 인상을 준다면), 원고의 청구가 인용될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차용증이 없더라도 소비대차계약 사실이 존재한다면 간접사실 등으로 입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방법이 복잡하고 금액의 액수와 상관없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차용증을 작성하거나, 적어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차용증 양식을 활용하는 등의 성의가 필요하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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