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기감사 시즌이 되면 인사부서의 업무는 배로 늘어난다. 사전에 제출해야 하는 자료의 양이 시작하기 전부터 사람을 지치게 한다. 자료도 자료지만, 이번 감사가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괜히 불안해지기도 한다.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업무상 실수나 과실로 감사로부터 주의나 경고장을 받은 건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나서가 처음이었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고용형태와 근무형태도 제각각이다 보니 아무리 꼼꼼하게 일처리를 해도 크고 작은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작은 실수가 제때 발견되지 않으면 모이고 모여 큰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다. 차라리 내부감사를 통해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는 편이 낫기도 하다. 오죽하면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다’라는 말로 서로를 위안하겠는가.
인사업무는 ‘사람’에 대해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일터의 구성원이 3000명이면, 3000명이 생각하는 ‘올바르고 공정한 인사’가 다 다르다. 물론 법과 규정, 취업규칙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명백하게 활자로 나타난 내용을 두고도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다르면 ‘틀리고 잘못된 일’이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회사에서 얻은 정보로 사사로운 이익을 봤다거나,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고, 거액을 횡령했거나 금전적인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감사관에게 털리고 경고장까지 받고 나면 억울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한동안 근로의욕을 상실하기도 했다. 게다가 감사의 지적 사유가 스스로 인정할 만큼의 큰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경우라면 의욕 상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갈 데 없는 분노가 치밀 때도 많았다.
차라리 내가 아무 일도 안 했더라면, 적당히 대충대충 ‘조용한 사직자’ 대열에 동참했더라면, 아니, 애초에 여기에서 이렇게 노예처럼 부림 당하는 줄 알면서도 쓸데없이 ‘적극적’으로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갖지 않았을까.
그런 맥락에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은 고구마를 10개쯤 먹고 가슴이 턱턱 막힐 때 들이킨 사이다처럼 통쾌하고 시원하다. ‘실적 잘 내고, 주주들한테 도움이 되고 있는 사람을 프레임을 씌워 찍어내리려 한다’, ‘이렇게 개같이 일했는데 나를 묻으려고 그런다’, ‘법인카드 사용내역이요? 야근식대밖에 없어요, 배민.’ 3주가 넘도록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어록에는 모든 K-직장인의 애환이 담겨 있다. 특히 ‘이 개저씨들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가 백미였다. 뼈 빠지게 일하지만 승진에서 밀리고, 입바른 소리하고 나댄다고 한 번이라도 찍혀본 여성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2시간이 넘게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울분을 토하는 모습은 언젠가의 사무실에서, 임원실에서, 감사장에서, 혹은 경찰조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억울함을 토로하던 내 모습을 닮아 있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분노에 공감하기도 하고, 다양한 형태의 밈으로 재생산하며 주목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회사의 대표이사이고 지분과 풋옵션 행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금액이 일개 직장인인 나로서는 평생을 일해도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금액이라는 점에서 언감생심 비교할 계제가 아니긴 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100% 공감할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내가 진짜로 ‘산고의 고통’을 겪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엄마라는 점 때문이다.
10개월씩 품고 다니며 산고의 고통을 겪다가 배를 갈라 낳았지만 한 번도 그들을 나 혼자, 혹은 나와 배우자 단 둘이서만 생산해 낸 ‘소유물’로 여기거나 대상화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 왔다. 한 뱃속에서 나왔어도 너무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사실과 그들 또한 각자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간다는 점도 배웠다. 내 아이를 개별적으로 존귀하게 다뤄야 할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면 다른 아이 또한 모두 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가 산고의 고통까지 느끼며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어 낸 케이팝 콘텐츠는 아주 독창적이고 성공적인 성과물이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오로지 그 혼자만의, 혹은 그 주변의 조력자들만의 결과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조직이 갖추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와 물적 인프라가 있었을 테고, 그의 네임밸류만큼이나 모회사인 하이브의 가치를 보고 투자를 선택한 주주들도 있었을 테다.
그의 거침없는 표현 덕에 직장 내 젠더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이슈가 되긴 했지만, 그보다 더 밑바닥에는 너무도 비대해진 자아와 내가 만든 결과물 외의 나머지에 대한 폄하가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 무엇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천재적인 크리에이티브가 바탕이 되었든, 고도의 전략과 자본력으로 만들어냈든 관계없이 케이팝 콘텐츠는 결국 ‘사람’이 주재료이며, 그것을 소비하는 대상 또한 ‘사람’이다. 모두가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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