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4월 22일부터 26일까지 독일의 하노버에서는 산업박람회가 열렸다. 일명 ‘하노버 메세’라고 불리는 이 행사는 독일 최초의 수출 박람회로 역사가 매우 깊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매우 어려웠던 독일을 다시 일으킨 경제 기적의 상징으로도 유명하다.
1947년 ‘독일 하노버 수출 박람회’라는 이름으로 막을 올린 하노버 메세는 21일간의 박람회 기간에 전 세계 53개국에서 약 73만 6000명의 방문객이 하노버를 찾았다. 3200만 달러에 가까운 수출 계약이 체결되는 큰 성과를 냈다.
이 행사 덕분에 1952년 작은 도시 하노버에 국제공항이 생겼다. 1960년 메세에는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왔는데, 도시의 숙박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시민들이 방문객들에게 자기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13만 명이 방문하고 박람회장과 가까운 호텔 하룻밤 숙박비가 600유로(90만 원)인데도 만실이던 올해보다 과거의 메세가 오히려 훨씬 혁신적이고 열정 가득했던 것 같다.
#하노버 메세만의 혁신 아이디어
국제 박람회 기간이 되면 숙소 구하기가 어렵고, 터무니없이 비싸지는 것은 하노버만의 얘기가 아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돈을 들여서 박람회에 와야 하나….’ 소위 ‘현타’는 숙박비뿐만 아니라 박람회장에서 한 잔에 6유로(9000원)인 커피 가격을 볼 때도 찾아온다.
이런 참가자들의 고민을 반영한 듯 하노버 메세에는 캠핑장을 마련했다. 캠핑카를 가져와 쓸 수도 있고, 나무 오두막 형태의 방갈로를 며칠간 빌릴 수도 있다. 공용 샤워장, 화장실, 라운지 등 부대시설도 갖췄다. 박람회 기간에만 문을 열고, 박람회 방문객 및 전시자만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외관은 캠핑장이지만 내부는 또 다른 메세 현장이 된다. 아침이면 캠핑카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이 박람회장으로 같이 출근하는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캠핑카가 있다면 하루에 27유로(4만 원)로 캠핑장을 이용할 수 있고, 대여할 수도 있다. 방갈로는 2인실이 하루에 129유로(20만 원)로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박람회장과 가장 가까운 숙소이기에, 하루 종일 걷거나 서 있는 참가자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분명하다.
#녹색산업 전환을 선도하는 노르웨이
메세 현장으로 조금 더 들어가보자. 2024년 하노버 메세의 파트너 국가는 노르웨이였다. 노르웨이는 수십 년 동안 지속 가능한 에너지 솔루션 분야의 선두 주자였다. 올해는 ‘녹색 산업 전환 개척(Pioneering the Green Industrial Transition)’이라는 주제로 녹색 전환에 필요한 에너지, 제조 및 디지털화 분야의 주요 기업들을 소개했다.
노르웨이는 100년 넘게 수력발전 산업에 청정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노하우를 축적했다. 해양 산업, 양식 산업에서 활용하던 기술이 지금의 녹색 산업에 이르기까지 해양 산업 운영, 첨단 소재 생산, 재생에너지 및 첨단 기술 공급 산업에서 쌓은 탄탄한 경험을 바탕으로 배터리, 수소, 해양 재생에너지, 탄소 포집(CCS)과 같은 새롭고 지속 가능한 산업 영역에 귀중한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지속 가능성과 친환경 솔루션을 찾는 벤처 투자자에게도 매력적인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 중 디지털화가 매우 빠르고, AI 등 신기술 적용에도 열려 있다. 노르웨이 연어 양식장은 대부분 디지털화 되어, 모니터할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자동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 노르웨이는 산업 부문 혁신인 인더스트리 4.0을 주창한 독일보다 첨단 디지털화 및 스마트 기술, IoT, AI 및 자동화 같은 최첨단 기술을 채택하는 데 빨랐다. 그래서 독일은 올해 노르웨이의 디지털화에서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태도로 임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공급에 많은 문제를 겪은 독일은 이번 메세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을 위한 노르웨이와의 협력’이라는 내용으로 사업가들뿐만 아니라 로베르트 하벡(Robert Habeck) 경제에너지부 장관이 참여하는 공식 세션도 준비했다.
올해 총 68개의 노르웨이 기업이 하노버 메세에 참여했는데 이 중 스타트업은 2개였다. 파트너 국가치고는 매우 적은 편인데, 양보다는 질로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노르웨이의 첫 번째 스타트업 에너지네스트(Energynest)는 에너지 제조 및 신재생에너지 산업 고객에게 비용효율적인 열에너지 저장(TES) 시스템을 제공하는 회사다. 제조 과정에서 생산된 폐열을 전기로 전환해, 에너지 공급 과정에서 버리는 것 없이 에너지를 회수하거나 용도를 바꾸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2011년 설립한 다소 나이 많은(?) 스타트업이지만, 여전히 50인 이하의 작은 규모로 운영하며, 독일 함부르크와 스페인 세비야에 지사를 두고 유럽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에너지 네스트는 글로벌 청정에너지 혁신을 위한 이니셔티브인 미션 이노베이션(Mission Innovation)에서 선정한 글로벌 TOP100 탄소 감소 혁신 부문에서 3위를 차지했다.
두 번째 노르웨이 스타트업 오티(OTee)는 산업 자동화 플랫폼으로, 산업 자동화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엔지니어들이 개방형 표준 가상 제어 시스템을 손쉽게 배포,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실시간 제어가 가능한 자동화 플랫폼을 코드 없이(no-code) 만들 수 있고, 주로 공장, 제조 시설 등의 자동화에 쓰이는 솔루션이다 보니 안정성을 가장 큰 무기로 삼았다. 산업 표준(IEC 61131-3)에 따라 전기를 제어하는 PLC 로직을 프로그래밍하고, 시뮬레이션, 컴파일할 수 있다는 점이 큰 강점이다.
오티는 글로벌 VC인 앤틀러(Antler)의 투자를 받았고, 유럽의 딥테크 얼라이언스(DeepTech Alliance), 노르웨이 정부의 스타트업 및 기업 지원 기관인 이노베이션 노르웨이(Innovation Norway)의 지원을 받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노버에 온 한국 기업들
하노버 메세 한국관에는 LS 일렉트릭, 한화 솔루션즈, SK 등 대기업을 포함해 약 70개의 한국 기업이 참여했다. 한국관을 운영한 코트라뿐만 아니라 한국무역협회, 한국기계산업진흥회, 한국로봇산업협회, 한국전자기술연구원 등의 공공기관과 창원시, 안산시, 경북 칠곡군 등 다양한 지자체도 함께했다. 파트너 국가인 노르웨이에 준하는 수준이다.
하노버 메세의 무시무시한 숙박비를 감안한다면, 이렇게 많은 한국 기업이 참여한 것은 상당한 지원과 노력 없이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기업이 부스를 내는 경우 부스 설치에 드는 비용, 직원을 파견하느라 드는 항공료·숙박료 등 고려해야 할 비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기에 작은 스타트업이라면 ‘박람회’가 세일즈와 마케팅 수단으로 정말 적절한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한국의 일도 대응해야 하고, 중간중간 온라인으로 미팅도 해야 하는 등 업무가 2~3배 늘어나지만 양쪽 일을 다 만족스럽게 못했다는 아쉬움을 갖고 돌아가는 한국 스타트업을 너무도 많이 봤다.
매해 참가하는 박람회에서 최대한 성과를 내려면 사전 준비와 후속 업무는 필수다. 올해 박람회에서 만난 잠재 고객사를 내년에 같은 박람회에서 또 만난다는 걸 가정하면서, 그간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대화할지를 잘 시뮬레이션하는 것도 중요하다. 박람회에서는 뜻밖에 큰 고객사를 만날 기회가 많고, 그런 기업들은 매년 같은 박람회에서 만나는 스타트업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예의 주시하는 일도 많다. 익숙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고군분투하는 한국의 모든 스타트업에게 박수를 보낸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유럽스타트업열전] AWS, MS, 구글이 전력 문제에 사활 건 이유
·
[유럽스타트업열전] 중국 스타트업 '니오', 자동차 종주국 독일에 도전장 내밀다
·
[유럽스타트업열전] '직접탄소포집', 혁신일까 그린워싱일까
·
[유럽스타트업열전] '호라이즌 유럽'이 우리 스타트업에 '기회'인 까닭
·
[유럽스타트업열전] 가뭄과 물 부족 해결할 혁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