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책자형 선거공보 우편물을 받았고, 이제껏 받아본 선거공보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꼼꼼히 살폈다. 예전보다 오랜 시간을 들인 것은, 정말 답답할 정도로 아무도 뽑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지난 2022년 대선도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 말이 많았는데, 이번 총선도 역대급 비호감 총선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선거공보물을 들입다 보는 건데, 뭐 알다시피 대동소이한 정책에 뜬구름 잡는 소리가 많아 누구 하나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최선 아닌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게 선거라지만, 차악도 차악 나름이고, 심지어는 모두가 최악 같기도 하다.
사실 진지하게, 이번에 투표하지 말까 생각했었다. 사표가 되지 않으려 내 나름의 차악을 선택했을 때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나 하는 그간의 경험, 그리고 사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뽑은 내 나름의 최선의 행위가 남들에게 비난받은 경험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자고 옛날 도덕선생님 같은 마인드로 꾸역꾸역 다시 마음을 다잡고는(정확히는, 이렇게 투표를 안 하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안 할 수도 있겠단 생각에), 그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일부러 영화도 챙겨 봤다. 선거 시즌이면 으레 소개되곤 하는 롤모델 같은 영화,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2012년작 ‘스윙 보트(Swing Vote)’다.
‘스윙 보트’는 ‘나의 한 표로 선거의 승패가 갈린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제목도 선거 등의 투표 행위에서 누구에게 투표하지 결정하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 스윙보터(swing voter)에서 따왔다. 영화 속 상황은 이렇다. 치열한 접점 중인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뉴멕시코주 개표만 남기고 현역 대통령인 공화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가 동률의 선거인단 표를 지닌 상황에서,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시코에 사는 이혼남 버드 존슨(케빈 코스트너)의 표로 선거의 승패가 갈리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사실 버드는 딸 몰리(매들린 캐롤)에게 ‘투표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만큼 선거는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 문제는 아빠보다도 똑똑한 몰리가 술에 취한 아빠 대신 마감 직전의 투표장에서 몰래 투표를 시도한 데서 일어난다. 몰리가 투표하려는 순간 하필 정전으로 투표기가 꺼지고, 집계되지 못한 몰리, 아니 버드의 무효표가 발견되며 그가 열흘 후에 재투표를 해야 하게 된 것. 즉, 버드의 표 얻는 후보가 뉴멕시코주 선거인단 5명의 표를 가져가며(미국 대선은 승자독식 체제의 간접 선거) 백악관의 주인이 판명되는 것이다.
버드의 재투표로 대통령이 결정된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단 한 사람의 유권자에 불과한 버드를 향한 두 대선 후보의 눈물겨운 선거운동이 펼쳐진다. 단 한 사람의 표만 얻으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마는, 두 후보와 후보들을 둘러싼 참모진들의 행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입가경이다. 레전드 카레이서 리처드 페티나 컨트리 가수 윌리 넬슨 등 버드의 취향을 겨냥한 인물들을 내세워 버드를 자신들의 공간에 초대하며 친근하게 구는 건 귀여운 시작이었다.
딸과 함께 강에서 낚시하는 것이 취미인 버드를 위해 개발 대신 환경보호정책으로 급선회하는 공화당이나 생명 존중과 선택권 존중 중 어느 쪽이냐는 질문(임신 중단 권리에 대한 찬반)에 버드가 순진무구하게 “생명은 소중한 거 아닌가요?”라고 답하자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임신 중단 권리(낙태)를 비난하는 광고를 찍는 민주당 등 기존의 정책은 뒷전이고 오직 버드의 환심을 사려는 포퓰리즘 공약이 남발되기 시작한다.
후보들의 이런 말도 안 되는 포퓰리즘 공약 남발에는 ‘이기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뜻을 품었어도 펼칠 수 없으니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생각이 거대 양당이 아닌 소수 정당에 투표하려는 유권자들에게 사표론을 제기하며 비난하는 이유일 것이고, 더 나아가 자기를 뽑지 않을 사람이면 차라리 투표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의향을 내비치는 후보들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영화에선 뒤로 갈수록 후보들 스스로 “이게 정말 맞아?” 하며 오직 이기기 위해 기망을 일삼는 자신들의 모습에 회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버드 또한 딸 몰리와 부딪히면서 깨달음을 얻고 마지막 후보 토론회에 앞서 감동적인 말을 남긴다. “저는 부끄러운 아버지이자 국민이었습니다. 봉사도 희생도 할 줄 몰랐고, 가장 큰 의무라 해봐야 과심 갖고 투표에 참여하라는 것뿐이었죠. 미국에 진짜 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저일 겁니다.”
버드처럼 내 표 하나로 승패가 갈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표 하나하나가 모여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 그래서 투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고민해 보련다. 투표의 의미를 찾지 못한 분들이라면 영화 ‘스윙 보트’를 한 번 보시라. 케빈 코스트너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라 저항감 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웨이브와 왓챠에서 시청 가능하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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