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서울 성수동 연무장길에 독특한 공간이 생겼다. 모베러웍스가 만든 30석 규모의 단관 극장 무비랜드가 그곳이다. 극장은 사양 산업이라고들 한다. 그나마 운영이 지속되는 극장도 대기업이 만든 멀티플렉스가 대부분이다.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된 지 오래인 지금 단관 극장이라니. 게다가 소위 ‘천만 영화’로 대표되는, 인기 있는 최신 개봉작은 틀지 않는다는 상영 계획은 언뜻 시대를 역행한 느낌마저 든다. 물론 극장이라는 것은 대책 없이 만들 수 있는 시설이 아닌 만큼, 무비랜드를 설립한 모베러웍스의 확고한 운영 방향에 눈길이 간다.
무비랜드와 기존 대기업 영화관(멀티플렉스)의 차별점은 무엇보다도 브랜딩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CGV나 메가박스 같은 멀티플렉스에도 브랜딩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지점 단위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멀티플렉스를 찾은 관객이 영화와는 별개로 해당 영화관의 브랜딩 취지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경험을 하긴 어렵다. 그리고 관객도 그런 면을 기대하고 멀티플렉스를 찾지는 않는다. 영화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가가 우선이고 영화관은 가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모베러웍스는 무비랜드의 디자인 콘셉트를 설정한 후 초기 회의부터 각 파트너와의 미팅, 기존 건물 철거와 신축, 주저하고 고뇌하는 모습 등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영상으로 기록한 후 자체 채널에 업로드함으로써 건립 과정 자체를 하나의 극으로 만들고 극장을 그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다른 업종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영화관 브랜딩이란 질문에 다른 답을 제시한 셈이다.
무비랜드 브랜딩의 중요한 축을 담당할 내부 디자인 콘셉트는 ‘아메리칸 빈티지’라는 말로 정의된다. E의 맨 위쪽 가로획을 살짝 짧게 만들고 A의 윗부분을 평평하게 다진 독특한 로고타입, 출입문부터 라운지와 상영관에 이르기까지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난색 톤 내장재, 매점 음료 디스펜서에 크게 붙은 장식성 강한 펩시콜라의 옛 로고, 스크린 앞 카펫 그래픽, 라운지에 놓인 대형 세라믹 월과 곳곳에 놓인 오브제처럼 크고 작은 디자인 요소가 이를 밀도 높게 뒷받침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뿐 아니라 그것을 상영하는 장소까지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길 수 있다.
아메리칸 빈티지는 본래 우리 생활에 있던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 아메리칸 빈티지를 지향한 공간에 들어가는 일은 일상이 아닌 어딘가로 떠나는 경험이다. 기존 멀티플렉스가 보여주던 것과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무비랜드에 어울리는 콘셉트다.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 한글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글을 애용하자’는 단순 무식한 소리가 아니다. 로고타입을 바탕으로 파생하거나 무비랜드가 지닌 다른 아이덴티티를 기초로 한 한글 서체가 있다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확장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앞서 언급했듯 무비랜드는 상영작의 기준을 ‘최신’과 ‘상업성’에 두지 않는다. 오픈일인 2월 29일부터 한 달간 극장주 모춘이 고른 ‘백 투 더 퓨처’, ‘대부’, ‘개들의 섬’, ‘대취협’이 스크린을 수놓았고 4월부터는 코미디언 문상훈이 엄선한 4편의 코미디 영화를 상영한다. 최신과 상업성을 배제한, 게다가 SNS 게시물에 달린 어떤 댓글처럼 ‘레이저 영사기도 아니고 돌비 애트모스도 안되고 관도 작고 시트도 직물인데 티켓값은 다른 독립 영화관보다 두세 배 비싼’ 극장 운영은 거대한 도전이다. 그래도 필자는 상영작 포스터까지 일일이 리디자인하는 무비랜드의 생존에 조심스레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진심을 다해 뾰족하게 갈고 닦은 주관이 실패하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 무비랜드의 성공에 영감을 받은 창작자들이 거대 자본만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장에 자신만의 감각으로 도전하는 사례가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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