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원래는 넷플릭스 ‘닭강정’에 대해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칼럼 담당 기자의 말에 흔들렸다. “’삼체’ 보세요! 세 번 보세요!’ 내가 그를 안 지 수년이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열성적으로 추천한 건 처음인 것 같다. 그럼에도 주저함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수포자’였고, 6학년 땐 ‘과포자’를 추가했던 문과 감성인지라 어지간한 SF물은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심지어 ‘인터스텔라’도 작년에야 봤다). 그렇게 진입장벽이 컸던 ‘삼체’. 어땠냐고? 보시라. 세 번까진 모르겠지만, 두 번은 볼 수 있다.
‘삼체’는 SF소설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최초로 수상한 류츠신 작가의 소설이 원작으로,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 와이스 등 ‘왕좌의 게임’ 제작진이 각본과 제작을 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제목인 ‘삼체’는 세 개의 물체가 중력으로 서로를 당기며 움직일 때 그 궤도를 구하라는 고전 역학 문제인 삼체 문제에서 비롯됐다. 제목부터 문과생을 움찔하게 만드는데, 국내에서 진행된 전야 스크리닝&GV에 참여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또한 “제목부터 모든 것이 물리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며 ‘물리학자의, 물리학자에 의한, 물리학자를 위한 시리즈’라 호평했다. 과학 쪽은 쳐다보기도 싫은 문과생이라고 지레 좌절하진 말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삼체’를 읽고 백악관의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졌다고 말했을 만큼 작품의 스케일이 압도적이고 흥미진진하니까. 그리고 보다 보면 진지하게 곱씹고 성찰할 만한 요소가 도처에 널려 있다.
‘삼체’는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1960~70년대 과거의 중국과 현재의 영국을 넘나들며 시작한다. 1966년, 문화대혁명에선 예원제(청년: 진 쳉, 노년: 로절린드 차오)의 아버지가 학생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친 과학자란 이유로 인민들 앞에서 맞아 죽는다. 2024년의 영국에선 ‘옥스포드 5인방’이라 불리는 뛰어난 과학자들의 교수였던 베라 예(베데트 림)가 그 어떤 죽음의 암시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문제는 베라 예 교수뿐 아니라 근래 들어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이 불가사의한 죽음을 맞고 있다는 것.
1960년대의 중국과 현재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아버지의 무참한 처형을 목격한 예원제는 반동분자의 자식으로 노역장으로 끌려갔지만, 그 뛰어난 실력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비밀 군사기지에 입성하게 된다. 그곳은 어딘가 있을지 모를 외계의 존재를 향해 메시지를 발신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곳. 그리고 어느 날, 예원제는 외계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한 발신자는 더 이상 회신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예원제는 답장을 보내고야 만다. “와라, 우리 문명은 이미 자구력을 잃었다. 이 세계를 점령하도록 내가 돕겠다.”
예원제의 답장은 현재 영국을 비롯해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과학자들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베라 예의 제자들인 다섯 명의 과학자, ‘옥스포드 5인방’의 활약이 더해지며 이야기를 이끈다. 다이아몬드마저 썰어버리는 합성 고분자 나노섬유를 개발한 오거스티나 살라사르(에이사 곤살레스), 베라 교수의 죽음 이후 그가 갖고 있던 게임기에 접속하며 ‘삼체’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물리학자 진 청(제스 홍), 베라와 함께 마지막까지 일하고 있던 옥스포드 입자가속기 연구원 사울 듀랜드(조반 아데포), 일찍이 학교를 중퇴하고 사업을 시작해 큰 부자가 된 잭 루니(존 브래들리), 진 청을 사랑하지만 진의 남자친구와 자신의 췌장암 때문에 고백하지 못하는 대학교수 윌 다우닝(알렉스 샤프)이 그 주인공인데, 이들은 시리즈를 위해 개발된 캐릭터들이라 원작 팬들에게도 어떤 인물이 어떤 식으로 재창조됐는지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양자역학 같은 물리학에 관심이 없다면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는 부분도 많지만 이과생과 문과생 모두 흥미로울 지점은 많다. 특히 외계인의 침공에 대비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극 중 태양이 3개인 행성에 사는 외계인을 뜻하는 ‘삼체’는 태양계 너머 다른 항성계에서 오고 있기에 400년 뒤에나 올 것으로 계산된다. 400년 뒤라면 나와 자식은 물론이고, 손주에 증손주에 고손주도 살지 않을 시기. 2024년의 400년 전인 1624년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던 인조 시대인데, 그때 내 조상이 400년 뒤 후손인 나와 지구를 위해 무언가를 발벗고 나서서 할지는 의문이거든(나만 그런가).
아무려나 ‘삼체’의 캐릭터들도 400년 뒤 외계인 침공에 대해 각양각색 행보를 보이는데, 모두가 나 같지는 않은지라 누군가는 침공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인류의 외계 행성 침공 과정 방어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인간과 지구와 우주의 관계를 훑으면서, 과학과 철학, 종교와 정치 등에 강렬한 질문을 곳곳에 던지기에 그에 대한 나의 답을 곱씹게 되는 게 드라마를 보는 재미 요소 중 하나다.
VR 게임 속 묘사된 삼체 문명 또한 강력한 볼거리. 게임 유저와 레벨에 따라 고대 중국 왕조와 영국 튜더 왕조, 몽골 제국 쿠빌라이칸 등 각 시공간을 무대로 외계 행성의 가상현실을 실감나게 재현하는데, 컴퓨터 그래픽과 LED 무대 세트 등을 활용해 미술에 공을 들인 티가 물씬 난다. 나노 섬유로 거대한 선박을 뎅강뎅강 잘라버리는 장면에선 소름이 끼칠 정도다.
이번에 드라마화된 ‘삼체’는 2000쪽 가까이 되는 총 3부작 소설의 1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앞으로 후속 시즌을 통해 해야 하는 이야기가 방대하게 남아 있다. 넷플릭스에서 아직 시즌2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지만 이미 공개 이틀 만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TV 시리즈 1위로 등극한 것을 보면 다음 시즌은 당연해 보인다. 방대한 원작 소설을 탐독할 시간은 충분하니, 드라마와 함께 즐겨 보시길 추천.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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