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유한양행에 회장·부회장 직제가 부활했다. 유한양행은 15일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정관 일부 변경의 건’을 약 95%의 찬성률로 통과시켰다. 28년 만에 회장직이 부활한 가운데, 일부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이정희 전 사장의 ‘회사 사유화’ 의혹이 시위로까지 번지면서 논란이 커지는 모양새다. 이들은 “현 경영진의 배임 횡령 등에 대해 수사기관에 고발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일한 박사 정신에 맞다고 생각하나” 주주들 반발
최근 ‘회사 사유화’ 논란을 겪고 있는 유한양행에 회장·부회장 직제가 부활했다. 유한양행은 15일 서울 동작구 본사에서 열린 ‘제101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정관 일부 변경의 건’을 약 95%의 찬성률로 통과시켰다. 회사 창립 시부터 유한양행 정관에 회장직을 선임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2009년 주주총회에서 삭제됐다가 이번에 되살아난 것이다. 이날 변경된 정관에는 ‘이사 중에서 사장, 부사장 등을 선임할 수 있다’는 조항에서 ‘이사 중에서’ 부분을 삭제하고, ‘대표이사 사장’으로 표기된 것은 표준 정관에 맞게 ‘대표이사’로 변경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날 주주총회에서는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가 사내이사로 재선임되며 연임에 성공했다. 김열홍 R&D 총괄 사장도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회장직에 오를 인물로 거론됐던 이정희 이사회 의장은 기타비상무 이사로 재선임됐다. 이로써 이 의장은 이사회에 12년간 머무르게 됐다. 조 대표는 정관 변경과 관련해 “제약 산업에서 살아남으려면 혁신 신약을 개발해야 하는데 연구개발 분야에서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 직제 신설은 사심이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에 제 소속과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다. 회장과 부회장을 두더라도 임원의 일부로 직위만 다는 것이지, 특권을 주거나 이런 것은 없기 때문에 주주들이 이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총에 참석한 주주들은 직제 신설을 중점적으로 질의했다. 주주 A 씨는 “연구개발 분야 인력을 늘리는 것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이런 식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속하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단순화해야 하는데, 오히려 조직을 무겁고 관료적으로 하는 모양새가 우려스럽다. 지금 조직으로도 충분히 운영이 가능하지 않나”고 물었다. 주주 B 씨는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외부 인사가 유한 정신과 문화를 승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굳이 이 시기에 표 대결을 하면서까지 이런 안건을 낸 것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안건이 유일한 박사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정신에 맞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고 지적했다.
이날 유한양행 OB모임인 유우회 회장과 유한양행 노조위원장은 찬성의 목소리를 냈다. 김인수 유우회 회장은 “요사이 유우회 내에서도 ‘오너 없는 유한이 왜 회장 제도를 도입하려고 하나’라는 질문이 나왔었다. 과거 일부 기업들의 인사전횡 등으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 같다”며 “현 시점에서 유한이 글로벌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회장직이 신설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선임추천위원회 등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황우수 노조위원장은 “회사는 특정인에 의해 사유화될 수 없다.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노조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며 “우려와 걱정보다는 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럭 시위까지…“이정희 전 사장, 회장 만들려는 것”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으로 꼽히는 유한양행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한다는 유일한 박사의 이념에 따라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됐다. 1969년 유일한 박사가 조권순 당시 전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것이 시작이었다. 이번 회장직 신설이 논란이 된 이유는 이정희 전 사장이 회사를 사유화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전 사장은 임기가 끝난 후 물러난 이전 사장들과 다르게 퇴직하고도 기타비상무이사와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유한양행의 최대주주인 유한재단의 이사회에서 유일링 유학학원 이사가 배제된 점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장 직제를 신설하려 하자 일부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이 전 사장이 회장직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회장직 신설에 반대하는 임직원들은 유일한 박사의 53주기였던 11일부터 본사 앞에서 트럭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트럭에서는 “유일한 박사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일가족 누구도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윤 추구는 기업 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요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문구가 송출되고 있다. 이들은 조 대표의 채용 비리 의혹과 관련해서도 “기업과 개인적 정실은 그것이 가족이라 하더라도 엄연하게 구분돼야 하며, 그것이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자 보존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임직원들은 회장·부회장직 신설안 철회, 의장·재단 이사직 퇴임, 사장 단임 임기 후 퇴임 등을 요구하고 있다.
트럭시위에 참여한 직원 C 씨는 “블라인드 등 커뮤니티에서 이와 관련해 의견을 나눴고, 뜻있는 직원들을 중심으로 오픈카톡방을 개설해 논의했다. 일부 인원이 나서서 트럭시위와 법률에 대해 검토했다. 토스계좌로 직원들에게 익명 모금을 받고 있다”며 “회사에서 시위 주동자를 조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 경영진의 채용·투자 비리 및 배임 횡령 등에 대해 수사기관에 고발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총 이후에도 의장·사장 퇴임 운동을 위한 트럭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블라인드에서는 여전히 회사 직원들을 중심으로 회장직 신설을 포함한 정관 개정, 현 경영진의 무분별한 투자로 인한 손실, 이정희 전 사장의 퇴직금 수령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이번 정관 개정으로 이 전 사장은 유례없는 의장직 12년 연임을 하게 됐다. 직원 D 씨는 “유한재단의 이사마저 의장 라인 인사로 채워져 회사 경영에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사라져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사진이 인사나 경영, 투자 등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바로잡고 자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져 흔한 오너 기업과 다를 바가 없게 되어버렸다”고 토로했다.
김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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