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배우자의 승진이 누락되었다. 최근 2년 연속 성과평가 최고등급을 받았고(덕분에 가계부채가 많이 해소되었다) 작년과 달리 올해에는 승진 소요년수라는 자격요건을 충족한 해인 데다가 임원들의 관심사항이었던 신규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수행하고 있다는 평을 받아 왔기에, 시기상조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내심은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통장에 찍힌 성과급 금액을 보면서 나 역시 핑크빛 미래를 꿈꾸기도 했으니 둘 다 시원하게 김칫국을 한 사발씩 마셨다.
인사평가, 성과평가라는 인사 관리 절차와 달리 승진은 그야말로 운과 타이밍이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평가지표를 만들고, 그 평가기준에 대해 여러 협의 과정과 합의절차를 거친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공정하고, 보편적으로 공평하여 모두에게 수용도가 높은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되면 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 결국 사람인 모양이다.
어쨌든 최종인사권자의 낙점을 받아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는 여러 차례 승진이 누락되었던, 어느 임원의 표현에 따르면 ‘더 이상 누락되면 안 되는 벼랑 끝에 선’ 연차 높은 선배였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큰 깨달음을 얻는다. 좋은 평가 결과, 명시적으로 계량화된 실적수치가 반드시 승진을 보장하지는 않으며, 위계질서와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 회사일수록 ‘혁신과 쇄신’보다는 ‘조직의 안정’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배우자의 회사 뿐 아니라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 또한 마찬가지이며, 더 나아가 대다수의 한국 기업들, 그리고 우리 사회 자체가 여전히 갖고 있는 보편적인 분위기이다. 이런 역설을 가리켜 ‘딜버트의 법칙’이라는 용어도 있지 않은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의 조직문화가 위계주의, 집단주의 만큼이나 ‘능력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측정할 수 있든 없든 관계없이 거의 모든 것을 점수나 숫자로 치환하여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기를 좋아하고,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균이라는 허상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몰아붙이면서 불안을 부추기는 ‘성과중심의 무한경쟁’ 사회이면서 동시에 나이와 연차로 줄 세우고 '상호존중'이 아닌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수직적 선후배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이는 최근 시끄러웠던 축구 국가대표팀의 이른바 ‘탁구 게이트’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갈등 상황 속에서 10살 차이가 나는 선배이자 주장에게 나이 어린 선수가 경솔하게 대한 것은 물론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나이 차나 상하 관계를 떠나 각기 다른 성향과 이해관계를 지닌 여러 개인이 모이는 집단 안에서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폭력이 오간 것은 명백히 잘못이기는 하지만 당사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사과를 주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성과 품행, 국가대표로서의 자격’까지 운운하며 ‘보이콧’을 외친다거나, 더 나아가 해당 선수와 가족, 지인을 색출해 SNS에 비방댓글을 다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분노가 전혀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는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수백억 원의 이적금액으로 화제가 되고, 천재적 플레이에 열광하며 목청껏 응원하지 않았던가? 그가 저질렀다는 소위 ‘하극상’, 혹은 ‘선후배 간의 다툼 또는 대립’이 조직의 위상을 무너뜨리거나 하루 아침에 등을 돌릴 정도로 천인공노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문조사의 통계수치로 뭉뚱그려 그룹을 나누고 구분 짓는 것의 불완전성과 단순성은 일단 감수하고 최근 보도된 설문결과를 살펴보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그리고 직장 내 연공서열이 높은 중장년층일 수록 이강인 선수의 국가대표 발탁을 반대한다는 비판여론이 많다는 점 또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연차 선배들을 제치고 1년이라도 빨리 승진을 하면 마냥 기쁠 수 있을까? 입사도, 나이도 앞서는 고참들을 팀원으로 관리하는 자리에 오른다면 갈등을 조율하면서 조직을 잘 이끌 수 있을까? 보편적인 서열과 위계를 뛰어 넘어 오로지 ‘실력 하나’ 로 젊은 관리자를 선택하는 특별승진 이나 발탁인사 같은 이벤트는 여러 기업에서 종종 구사하는 HR전략이기는 하지만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키리라는 기대와 달리 정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능력주의라는 환상에서 비롯된 개인주의도, 위계질서에 따른 집단주의도 어느 하나 만으로는 견고한 조직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현실에 무난하게 안주할 수 있는 딜버트 속 세계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승진누락이든 직급갈등이든 정신승리하는 데에 그만한 처방약도 없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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