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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두 천재의 만남이 빛나는 '로알드 달 컬렉션'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로알드 달+웨스 앤더슨+넷플릭스=아카데미!

2024.03.15(Fri) 16:38:41

[비즈한국]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7관왕을 거머쥔 ‘오펜하이머’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일 테지만, 웨스 앤더슨 팬덤은 단편영화상 수상작인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시상식엔 불참했지만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는 웨스 앤더슨의 첫 오스카 수상작이다. 웨스 앤더슨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해도 로알드 달의 팬이라면 또한 이 수상에 기뻐했을 것이다. 넷플릭스가 웨스 앤더슨과 손잡고 공개한 ‘로알드 달 컬렉션’ 중 한 편이기 때문.

 

랠프 파인즈가 작가 로알드 달로 분해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배우들 또한 대사 외에 책 문장을 그대로 읊는 내레이션으로 연극적인 느낌을 물씬 선사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헨리 슈거’)는 ‘아동 문학의 대가’ ‘아동 문학계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작가 로알드 달이 1977년 발표한 청소년 단편집 중 한 편을 원작으로 했다. 액자형 구성으로 되어 있는 단편소설을, 역시나 연극이나 소설처럼 막과 장을 나눈 액자식 구성을 자주 선보이는 웨스 앤더슨이 영상화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웨스 앤더슨은 2009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Mr. 폭스’로 로알드 달의 세계를 연출한 바 있는데, 이번 넷플릭스의 ‘로알드 달 컬렉션’은 그 이후 두 번째 만남인 셈이다. ‘로알드 달 컬렉션’은 러닝타임 37분의 ‘헨리 슈거’ 외에 17분가량의 단편인 ‘백조’ ‘쥐잡이 사내’ ‘독’으로 구성됐다.

 

헨리 슈거는 수련을 통해 철저히 눈을 가려도 앞을 보는 서커스 단원을 만난 의사의 기록을 발견하며 큰 돈을 벌 수 있음을 직감한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헨리 슈거’는 영국인 헨리 슈거(베네딕트 컴버배치)란 남자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부유하지만 더 큰 부를 갈망하며 도박판을 전전하는 헨리 슈거는 우연히 친구의 집 서재에서 수련으로 투시력을 얻은 서커스 단원(벤 킹슬리)을 만난 의사(데브 파텔)의 기록을 발견한다. 기록에 적힌 수련법을 따라 투시력을 얻으면 도박으로 큰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직감한 헨리 슈거. 몇 년간의 수련을 통해 투시력을 익히지만 투시력으로 너무나 쉽게 거액의 돈을 따면서 잠시 망연자실해진다. 그러다 한 경찰관(랠프 파인즈)의 일침으로 깨달음을 얻고, 전 세계 도박판을 돌아다니며 돈을 따내 어려운 사람들을 후원할 고아원을 설립하게 된다는 이야기.

 

투시력으로 큰 돈을 벌었으나 망연자실함을 느낀 헨리 슈거. 그의 일탈적인 행동을 꾸짖으며 일침을 가한 경찰관 덕분에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헨리 슈거’는 로알드 달 특유의 독특한 상상력도 돋보이지만, 이야기의 독특함을 능가하는 듯한 웨스 앤더슨의 연출력이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단편임을 고려해도 기존의 영화 문법을 와장창 깨는 형식에 어안이 벙벙할 수 있다. 웨스 앤더슨 특유의 강렬한 색감의 무대장치를 배경으로 한 지극히 연극적인 진행에, 경직된 표정의 배우가 책의 문장을 속사포 같은 속도로 읽는 내레이션과 대사가 결합되어 그야말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영화가 탄생한다. 영화 커뮤니티 등에서 ‘뭐 이런 영화가 있나’ 하는 반응이 나올 만하다.

 

한 시청자는 이런 평을 남겼다. ‘(평범한 영화를 기대하고 본다면 충분히 짜증낼 만한 영화지만) 연출과 미장센, 독특한 구성을 기대한다면 마음에 들 영화이다.’ 맞다.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보통의 영화가 보여주는 흐름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헨리 슈거’를 꺼버릴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내레이션과 대사가 무척 빠르고 장대하다. 말 그대로 책을 읽는 식이라 잠깐 흐름을 놓치면 다시 뒤로 돌려야 할 판이다.

 

잔악한 인간본성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는 ‘로알드 달 컬렉션’의 ‘백조’와 ‘쥐잡이 사내’. 관객을 똑바로 응시하는 연극적 연출로 몰입감을 높인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약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만 ‘헨리 슈거’는 그만큼 신선한 경험의 시간으로 충분하다. 영화지만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 영화지만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오묘하다. 독특한 느낌으로 치자면 ‘백조’ ‘쥐잡이 사내’ ‘독’과 같은 컬렉션의 다른 단편들이 한 수 위다. ‘헨리 슈거’는 러닝타임도 그나마 길고, 어느 정도 서사가 있으며, 무엇보다 제법 유머러스하고 따스한 이야기에 속한다. 그러나 ‘백조’ ‘쥐잡이 사내’ ‘독’은 그보다 짧고 더욱 함축적인 메시지를 담아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느낌이다. 동네불량배의 괴롭힘으로 백조가 된 소년(백조)이나 쥐를 잡는다는 명목 하에 악랄한 잔혹함을 보여주는 남자(쥐잡이 사내), 위험에서 벗어나자마자 단번에 인종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내는 남자(독) 등 대체적으로 잔악한 인간본성을 그려내기 때문. 특히 몰입감이 일품인 ‘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비추는 ‘BRITISH JUTE’라는 팻말과 함께 많은 것을 시사하며 곱씹게 만든다.

 

우산뱀에 물릴 위기에 처해 꼼짝달싹 못하며 얼굴 근육만으로 대부분의 연기를 보여주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인상적인 ‘독’. 단편 소설의 묘미를 제대로 영상화한 작품으로, 마지막 팻말로 여러 가지를 곱씹게 되며 씁쓸함을 남긴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헨리 슈거’를 비롯해 ‘로알드 달 컬렉션’에는 제이슨 슈워츠먼이나 빌 머레이, 에이드리언 브로디 같은 ‘웨스 앤더슨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셜록과 닥터 스트레인지로 유명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헨리 슈거’와 ‘독’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데브 파텔과 벤 킹슬리가 참여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웨스 앤더슨과 합을 맞춘 랠프 파인즈는 내레이터인 작가 로알드 달 역할과 ‘쥐잡이 사내’의 쥐잡이 사내 등으로 분해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참고로 넷플릭스는 지난 2021년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를 인수해 로알드 달의 전체 작품을 영상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헨리 슈거’가 포함된 ‘로알드 달 컬렉션’은 이 세기의 인수 이후 진행된 프로젝트로,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것에 이어 아카데미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하며 호쾌한 출발을 내디딘 셈이다. 로알드 달과 웨스 앤더슨이라는 두 천재의 만남부터 범상치 않은데, 앞으로 넷플릭스가 펼쳐낼 로알드 달의 세계가 얼마나 황홀할지 벌써부터 두근두근거린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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