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부가 준공 30년이 지난 노후 주택은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에 착수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선하겠다고 나서자, 안전진단을 추진하던 초기 재건축 단지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번 대책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이 선행돼야 하는데, 기약 없는 법 개정을 기다릴지 현행 제도대로 사업을 추진할지 결정하지 못해서다.
정부는 1월 10일 주택공급 대책을 발표하면서 재건축·재개발 패스트트랙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준공 30년이 지난 주택은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사업에 착수하고 △정비구역 지정 전에도 주민들이 조합설립추진위원회를 꾸려 정비구역 지정과 조합 설립을 함께 추진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구상이다. 안전진단 제도는 폐지가 아니라 사업시행인가 전까지만 통과하면 되도록 시행 시기를 폭넓게 조정할 계획이다.
이번 발표에 앞서 정부는 지난해 1월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완화했다. 안전진단 통과에 큰 영향을 미쳤던 구조안전성 평가항목 비중을 기존 50%에서 30%로 낮추고, 주거환경과 설비노후도 비중을 각각 30%로 높였다. 안전진단 ‘조건부 재건축’ 판정 범위는 기존 30~55점 이하에서 45~55점 이하로 축소해 45점 이하가 즉시 재건축을 받도록 조정했다. 과도한 규제로 안전진단 통과 단지가 급감해 도심 내 주택공급이 위축됐다는 판단에서다.
이번 재건축 패스트트랙 제도 발표 이후 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구 신길우성4차아파트는 최근 안전진단 비용 융자 절차를 잠정 중단하고 안전진단 시행 시점을 주민 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했다. 이 단지는 당초 서울시와 SGI서울보증이 내놓은 재건축 안전진단 비용지원 융자상품을 이용해 안전진단을 추진했지만, 융자 실행을 위한 보증보험 가입을 목전에 두고 1·10대책이 발표되면서 안전진단 추진을 고민하게 됐다.
신길우성4차아파트 재건축사업 추진준비위원회 관계자는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하고자 서울시 융자지원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정부에서 추진위원회를 먼저 꾸리고 안전진단은 나중에 통과해도 된다고 하니 내부 혼선이 생겨 오늘(12일) 급하게 주민설명회를 열게 됐다. 비용이나 노후도 측면에서 안전진단은 조금이라도 늦게 추진하는 게 나을 수 있다는 판단도 나오기 때문에 시행 시점을 1~2년 미루는 방안을 주민 투표로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건축 안전진단 추진을 위한 비용 모금이나 동의서 취합도 난항에 빠졌다. 서울 서초구 양재우성아파트는 지난해 7월 안전진단을 위한 주민 모금을 진행해 지난해 말까지 약 170세대에서 목표 금액 절반가량을 모았지만, 1·10대책 발표 이후 모금 건수가 한 자릿수로 급감했다. 서울 도봉구 한양2·3·4차아파트도 안전진단 비용 융자상품 가입에 필요한 주민동의서를 취합하고 있었는데, 정책 발표 이후 동의서 징수가 사실상 중단됐다.
양재우성아파트 재건축사업 추진준비위원회 관계자는 “안전진단 비용 절반을 모금한 상황에서 패스트트랙 정책이 발표됐다. 제도 발표 이후에는 모금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라며 “실제 안전진단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니 안전진단을 추진할지 결정하기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한양2·3·4차아파트 재건축사업 추진준비위원회 관계자는 “정책 발표 이후 안전진단이 사라진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안전진단 비용 융자 관련 동의 징수 절차가 사실상 모두 중단됐다”고 덧붙였다.
초기 재건축 단지들이 혼선을 빚는 이유는 재건축 패스트트랙 도입에 법 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라 재건축 안전진단은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정비계획 입안 전에 실시하고, 추진위원회는 정비구역 지정 이후 설립해야 한다. 앞서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29일 재건축 안전진단 시점을 사업시행계획인가 전까지로 늦추고, 정비구역 지정 전에도 추진위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도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문제는 도정법 개정에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제21대 국회 임기는 오는 5월 29일까지로, 이날까지 국회에 상정돼 통과되지 않은 법안은 모두 폐기된다. 현재 국회에는 이번 도정법 개정안을 포함해 1만 6328건의 법안이 계류 중인데, 정부 대책을 담은 이번 도정법 개정안은 야당 반대로 이번 국회에서 합의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국토부는 도정법 개정안을 쟁점 법안으로 인식하고 통과 시기를 올해 5월 또는 하반기까지로 내다보고 있다.
백준 제이앤케이도시정비 대표는 “이번 정책 발표 이후 안전진단을 추진하던 초기 재건축사업 단지에서 안전진단 시행 여부를 두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상계동이나 방학동, 창동 등 안전진단 비용 모금을 진행하던 초기 단지들은 사실상 사업이 본의 아니게 중단됐다. 재건축·재개발 패스트트랙은 법 개정 사안이기 때문에 국회 논의와 제반 절차를 마치면 올해 하반기에나 시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까지 혼선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차형조 기자
cha6919@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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