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매달 투표로 등급을 정해 그에 따라 ‘합법적 왕따’를 뽑는 여고생들이 있다. 달꼬냑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피라미드 게임’의 백연여고 2학년 5반의 이야기다. 학교폭력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은 많았지만, 그 학폭 피해자를 모두가 평등하게(?) 투표로 정한다는 설정은 섬뜩하고도 신선하다.
백연여고 2학년 5반의 피라미드 게임은 단순하다. 투표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5표를 행사할 수 있다. 표가 많은 순서대로 A등급부터 D등급까지 나뉘며, 표를 못 받은 사람은 F등급이 된다. 일종의 인기투표처럼 보이지만, 이 등급은 한 달간 그대로 서열(계급)이 되어 A등급은 특권을 가지고 F등급은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다. 그 사이 B~D등급도 등급에 따라 서로를 동경하고 차별하고 멸시한다. 폭력의 시스템을 투표로 정하여 그를 공고히 하고, 그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와 방관자가 모두 섞여버리며 폭력에 물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런 기괴한 학급에 전학 온 성수지(김지연)는 준비없이 게임에 응했다가 0표를 받고 F등급이 된다. 게임 직전까지 친절하게 굴었던 친구들은 갑자기 안면을 몰수하고, 조롱과 멸시는 기본이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가혹한 신체적 폭력이 이어진다. 직업군인인 아버지 때문에 자주 전학을 경험한 성수지는 처음엔 몇 달만 견디면 될 거라 생각하지만, F등급에 가해지는 정신적·신체적 학대는 문자 그대로 지옥 같을 만큼 견뎌내기 어렵다. 궁지에 몰린 성수지는 또 다른 F등급 명자은(류다인)을 비롯한 친구들을 모아 연대를 결성하고 피라미드 게임을 붕괴할 작전을 세운다.
‘피라미드 게임’에서 게임을 기획하고 그를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계급의 최상위 포식자의 존재는 있다. 백연여고 이사장의 딸이자 재벌가 백연그룹 회장(남기애)의 손녀인 백하린(장다아). 이미 2학년 5반의 구성 인원 자체가 백하린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급우들의 부모 태반이 백연그룹 백하린과 QB그룹 막내딸 김다연(황현정), 서심병원 외동딸 서도아(신슬기) 같은 피라미드 상위 등급과 얽혀 있기에 같은 반 친구라도 은연중에 힘의 논리가 자명하다.
계급과 폭력의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건 투표지만, 그 투표의 이면에 자리잡은 것은 재력을 휘두르는 사회적 권력인 셈이다. 상명하복에 익숙한 군인인 성수지의 아버지 성희석 중령(최대철)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회의 축소판’이 2학년 5반의 피라미드 게임으로 정해지는 등급제다. F등급만 피하면 상위 등급일수록 얻는 혜택은 많으니, 상위 등급이거나 상위 등급자에게 잘 보여 등급이 올라갈 희망이 있는 이들은 더 철저한 방관과 묵인으로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든다.
잦은 전학으로 처세술에 능한 데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성수지 또한 두 번째로 임한 투표에서 F등급을 면하고 C등급으로 오르면서 시스템에 순응하여 방관자가 될 유혹에 휘말린다. 그러나 F등급이 사라진다고 이 게임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성수지는 ‘피라미드 게임을 쳐부술’ 계획을 짜기에 이른다. 성수지, 성수지가 전학 오기 전까지 게임을 거부하며 공식적인 F등급이었던 명자은, 그리고 D등급에서 F등급으로 떨어지며 수지와 자은의 연대에 합류하게 되는 표지애(김세희) 등 약자들의 모의는 점차 진화한다. D등급 동맹을 맺어 C등급을 늘려 피라미드를 마름모꼴로 만들어 체계를 무너뜨리려 하거나, 유일하게 게임을 반대한 전적이 있는 ‘인싸’ 아이돌 연습생 임예림(강나언)을 끌어들여 예상 외 인물이 등급을 혼란시키는 작전 등이 펼쳐진다. 마치 RPG게임 속 주인공 같은 ‘지능캐’ 성수지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신예 연기자들을 발견하는 재미는 ‘피라미드 게임’의 가장 매력적 요소다. 걸그룹 ‘우주소녀’의 보나로 잘 알려진 김지연은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고유림과 ‘조선변호사’의 이연주 등을 거쳐 안정적인 배우의 모습으로 안착한 형국이다. ‘믿고 보는 배우’의 길로 들어선 그를 향해 벌써부터 ‘제2의 서현진’ 같은 칭찬이 잇따르고 있다. 김지연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인급. ‘일타 스캔들’에서 얼굴을 비춘 류다인과 강나언, 넷플릭스 예능 ‘솔로지옥2’로 활약한 신슬기, ‘소년심판’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황현정 등 대부분 연기 경력이 짧지만 원작과의 싱크로율이 높고, 연기력 또한 제법 안정적이다. 걸그룹 ‘아이브’의 장원영 언니로 유명한 장다아 또한 데뷔작에서 비중 있는 주연급을 꿰찼음에도 불안정하지 않다. 빼어난 비주얼로 타입 캐스팅에 성공했고, 순진무구한 소녀의 모습 안에 감춰진 빌런의 연기도 나쁘지 않다. 알고 보면 또 다른 괴물인 2학년 5반 담임교사로 분한 최성원이나 기간제 문학교사로 등장한 안소요 등 어른 배우들의 롤도 훌륭하다.
‘피라미드 게임’ 속 세계관이 다소 과장돼 있지만 결코 현실과 무관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레퍼런스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하린으로 하여금 피라미드 게임을 착안하게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윌리엄 골딩(‘파리대왕’을 쓴 노벨문학상 작가)의 자전적 소설 ‘피라미드’가 떠오르고, 이문열의 원작 소설과 동명 영화로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오버랩된다. 아이돌 데뷔를 빙자해 A부터 F까지 줄지어 세워놓았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도 생각난다(‘프로듀스 101’도 백하린에 의해 조종되는 피라미드 게임 투표처럼 제작진의 불법적 개입이 존재했다는 게 밝혀져 씁쓸함을 남겼었다). 드라마를 재밌게 시청 중이라면 원작 웹툰 외에도 윌리엄 골딩과 이문열의 소설도 곁들여 보면 좋겠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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