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용어가 있다. 고전 라틴어에서 온 이 말은 ‘기계 장치로 무대에서 내려온 신’이란 뜻으로, 문학 작품에서 결말을 짓거나 갈등을 풀기 위해 뜬금없는 사건을 일으키는 플롯 장치를 말한다. 한마디로 해결사란 것. SBS 금토 드라마 ‘재벌X형사’에선 재벌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인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문제가 경찰 수사라는 게 재미 요소다.
‘재벌X형사’는 범죄, 액션, 스릴러, 코미디를 표방하는 성장형 형사물을 표방한다. 그러나 장르를 하나로 국한하자면 판타지로 봐야 한다. 주인공인 재벌3세 진이수(안보현)가 경찰이 되는 과정 자체가 판타지. 하루하루 재미만을 추구하며 사는 진이수는 어느 날 우연히 강하경찰서 강력팀이 수사 중이던 현장에서 시비가 붙은 한 남자를 정당방위로 때려잡는다. 오해로 인해 진이수는 무고한 시민을 때려잡은 폭행범이 되고, 그 일이 기사화되면서 시장 출마 선언을 한 진이수의 아버지인 한수그룹 회장 진명철(장현성)의 입장이 곤혼스러워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이수가 때려잡은 시민이 살인범. 살인범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진이수를 폭행범으로 잡아넣은 무능한 경찰이라는 비난이 두려웠던 경찰은, 진명철의 시장 출마 선언을 기사회생시켜려는 진이수의 형이자 한수그룹 부회장 진승주(곽시양)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바로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진이수가 얼마 전 변호사 특채로 경찰이 되었고, 비밀리에 강하경찰서 강력팀과 수사 중이었던 것이라고 무마하는 것. 그렇게 진이수는 하루아침에 낙하산으로 강력계 형사가 되어 버린다.
문제는 적당히 언론과 대중을 눈속임하는 선에서 끝낼 예정이었던 경찰 일에 진이수가 진심이 되어버린 데서 생긴다. 스카이다이빙부터 헬기 조종사까지 온갖 자격증을 지니고, 상어 떼 속에서 다이빙을 하고 레이싱 선수와 경기를 즐기는 스릴 마니아인 진이수는 원래도 경찰특공대 옷을 맞춰 입고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 서바이벌 게임을 할 만큼 경찰 일(?)에 아예 관심이 없진 않다. 그런 데다 첫만남부터 ‘혐관’으로 엮인 강하서 강력1팀 팀장 이강현(박지현)을 비롯해 형사들이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고 도발하자 진심을 다해 자신의 능력(재력)을 발휘, 보란 듯이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재벌X형사’는 한국 대중문화에서 ‘왕자님’ 아니면 ‘갑질’로 표현되던 재벌을 아예 ‘먼치킨’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후련함을 선사한다. 수색 영장 없이는 발도 못 붙일 VIP들의 공간을 조사해야 한다? 노 프라블럼. 진이수는 재벌3세답게 VIP들만의 비밀 클럽이며 요트 정박장이며 막힘없이 들어갈 수 있다. 용의자를 거액의 미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오밤중에 다급하게 가짜 돈이 필요한데 구할 수 없다? 노 프라블럼. 오밤중에도 시중 은행장을 호출해 10억이라는 거액의 진짜 돈을 턱턱 인출할 수 있는 게 진이수다.
그뿐인가. 유명 모델 요트 살인사건 케이스에서 재벌들의 행동 패턴과 다른 점을 일찍 파악하는 등 일선 형사와 다른 관점이 돋보이고, 유명 교수로부터 작품을 표절당하고 자살한 억울한 희생자를 위해 전시회를 열어주는 등 사건 해결 외에 선행도 손쉬운 일이다. 세상의 온갖 난관이 진이수에겐 휴대폰 한 번 열고 통화하면 다 ‘노 프라블럼’이다. 이강현이 “넌 대체 어떤 세상에서 사는 거냐?”라고 할 만하다.
재벌이라면 납치, 감금, 폭력, 방화, 살인 등 그 어떤 범죄도 무마하는 모습을 숱하게 대중문화에서 보아왔던 시청자들은 반대로 그 무소불위의 힘을 자기만족일지언정 정의구현에 쓰는 진이수의 모습에 쾌감을 느낀다. ‘번외수사’에서 부유한 형사가 자신의 부를 사건 해결에 활용하는 선례도 있었지만 진이수의 스케일은 ‘어나더 레벨’이다. 비교하자면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 정도? 타노스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진이수의 행보에 보통 사람들의 힘듦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이강현의 질문에 진이수가 “웬만한 건 다 되는 세상?”이라고 답할 때 우리는 그것에 분노하거나 허탈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끄덕일 뿐이다.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재벌을 미워하는 것처럼 굴다가도 무척이나 경외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에서 재벌은 왕족이나 슈퍼스타에 버금가는 위용을 자랑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처럼 대중에게 친근한 제스처를 조금만 취하면 대중의 긍정적 관심과 흠모도 가능하다. 딱히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처음부터 대놓고 진이수에게 호감을 드러냈던 강력1팀 막내 형사 최경진(김신비)처럼. 최경진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진이수의 판타지급 행보에 도파민이 충족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한 에피소드를 다 보고 나면 알게 모르게 허탈하다. 재벌이 ‘먼치킨’을 넘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세상이라니. 개미처럼 평생 열심히 해야 겨우 안온한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는 소시민들에게 웬만한 건 다 되는 세상에 사는 재벌들의 삶이 허탈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물론 ‘재벌X형사’에 깔려 있는 기본 뉘앙스는 코믹이고, 말했듯 이 드라마는 (온갖 현실 풍자 요소에도 불구하고) 판타지나 다름없으니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게다가 진이수는 재벌가의 혼외자식이라는 아픔 외에 친모의 죽음에 비밀이 있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향후 재벌3세란 타이틀을 벗어 던지고 혼자의 힘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재벌X형사’를 재밌게 보고 있지만, 일말의 불안함은 남는다. 앞으로도 재벌이 모든 장르의 해결사로 군림할까 봐. 그건 너무 손쉬운 해결책 아닌가.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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