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스타트업의 시작은 각양각색이다. 같은 학교 출신 친구들이 낸 재미난 아이디어가 사업이 되는 경우, 학문적 연구를 상용화할 기회를 찾다가 기업을 설립하는 경우, 때로는 큰 기업에서 떨어져 나와 창업하는 스타트업도 있다.
기억에 오래 남는 사례는 대체로 창업자의 삶과 사업 아이디어가 연결된 경우다.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일 수 있으나 창업자에게는 전 인생에 걸친 사건이자, 평범한 사람이 창업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유럽 스타트업 창업자 가운데 개인적인 문제나 고민을 확대해 사업에 적용한 이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희귀병 가진 창업자의 아이디어, 런던 스타트업 진허브
런던 스타트업 진허브(GeneHub)의 공동 창업자 크레이그 코울튼(Craig Coulton)은 어렸을 때 LCP병(Legg-Calve-Perthes)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았다. 이 병은 대퇴골두의 혈액 순환 장애로 인해 고관절에 염증이 생겨 관절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고 통증이 지속된다. 특별한 치료법이 없는 희귀병이라 환자는 평생 만성 통증에 시달려야 한다.
크레이그 코울튼은 희귀병도 언젠가는 정확한 처방과 치료가 가능한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진허브를 시작했다. 진허브는 환자 관리를 위한 건강데이터 베이스를 운영한다. 2022년 런던에서 공동창업자이자 CTO인 에드워드 스트레이튼(Edward Straighten)과 함께 창업했다. 에드워드 스트레이튼은 글로벌 VC인 앤틀러의 지원을 받는 예비 창업자였고, 크레이그 코울튼은 앤틀러에서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을 맡았다. 투자자와 예비 창업가가 공동창업이라는 한배를 탄 데에는 희귀병 치료하려는 크레이그의 열망이 크게 작용했다.
진허브는 환자가 자신의 DNA 데이터를 연구원 및 임상의와 익명으로 공유하는 최초의 환자 통제 바이오뱅크다. 환자는 무료 DNA 테스트와 건강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받는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고, 연구진은 환자들의 건강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밀 처방을 발전시키고, 정교한 약물 실험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환자의 약물 순응도를 향상해 약물 부작용과 약물 낭비를 줄여줌으로써 환자와 의료 시스템 모두에 도움이 된다.
환자가 자기 DNA 데이터에 접근하는 연구자를 통제할 수 있도록 진허브 한 곳을 통해서만 건강 데이터에 접속하게 했다. 예를 들어 연구기관이나 제약 회사가 LCP병 치료법을 개발하려고 한다면 진허브에서 환자에게 데이터 사용 허가를 요청해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
크레이그는 자녀가 자신과 같은 희귀병에 걸리게 될 것을 매우 걱정했다. 이를 알고자 했으나 아이의 DNA 분석에 최대 18개월이 걸린 데다 그 데이터에 누가 접근 가능한지도 투명하게 알 수 없었던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진허브를 창업한 것이다.
진허브는 2023년 앤틀러에서 16만 파운드(2억 6000만 원)의 프리 시드 투자를 받아 천천히 솔루션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난임인 사람을 위한 심리 솔루션, 스톡홀름 스타트업 틸리
제니-앤 액슨 존슨(Jenny-Ann Axson Johnson)과 안나 새인(Anna Sane)은 난임으로 괴로워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앤틀러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런 공통점으로 금세 가까워졌고 스타트업 틸리(Tilly)를 창업했다.
난임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만, 매우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진다. 가족과 친구에게 털어놓기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들은 심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는다.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끼지만 의지할 곳이 없고 적절한 도움을 받을 길도 없었다. 이들에게 디지털 치료제 역할을 하는 것이 틸리다.
틸리는 난임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심리 치료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불임클리닉과 협력해 환자에게 직접 심리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B2B 사업 영역도 동시에 개발하고 있다.
#의족은 장애인의 모빌리티, 독일 스타트업 호루스
베를린의 스타트업 호루스(Horus)는 하지 절단 장애인을 위한 의족을 제작한다. 정교한 기계공학 기술과 3D 디지털 디자인을 바탕으로 편하고 저렴할 의족을 개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들은 유럽 최대 모빌리티 스타트업 허브인 드라이브에 입주해 있다. 의족은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모빌리티이기 때문이다.
공동창업자이자 대표인 에두아르도 소텔로(Eduardo Sotelo)는 페루에서 독일 베를린공과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애스비언 야로타(Asbjörn Jarotta)가 절뚝거리며 부자연스럽게 걷는 것을 보고 “운동을 하다 다쳤냐”라고 물은 것이 인생의 큰 변화로 이끈 중요한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애스비언은 한쪽 다리가 없는 하지 절단 장애인이었고, 평소에 의족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던 차였다. 기계공학도였던 두 친구는 더 정교하고 저렴한 의족을 개발하자는 데에 뜻을 모았다. 특히 에두아르도의 고향인 페루와 라틴아메리카에는 유난히 하지 절단 장애인이 많았다. 관련 사고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의족을 얻기 어렵다. 에두아르도는 독일의 정교한 기계공학 기술을 적용하면서도 라틴아메리카에 값싸게 제공할 수 있는 의족을 개발했다. 호루스는 독일의 대기업 헨켈, 프라운호퍼연구소와 협업하면서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정주부로서 어떻게 하면 청소를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창업한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 대표, 육아를 하며 목디스크로 고생한 경험을 혁신으로 승화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니 아기띠의 임이랑 대표, 맛있는 LA갈비를 사기 위해 마트 주차장에서 2시간을 기다리다 부부싸움을 한 경험이 마켓컬리의 창업 아이디어가 됐다는 김슬아 대표. 때론 개인적인 경험을 세상 밖으로 꺼냈을 때 그 어떤 사업 아이디어보다 공감을 얻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을 혁신으로 꽃피울 창업자들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기대되는 이유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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