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우리의 고유 문자 한글은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 요소로 꼽힌다. 때문에 일상 제품에 한국 고유의 멋을 담으려는 작가 혹은 기업의 한글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모른다. 최근 3개월만 해도 한글 자음 형태를 젓가락 맨 윗부분에 부착한 ‘한글락’, 투명한 유리잔에 한글 자음을 가득 채워 인쇄한 ‘글라스락 코리안 헤리티지 에디션’, 한글 자음이 인쇄된 펜던트와 숱장식을 결합하여 만든 키링, 한글 자음 형태에 꽃 도안을 넣어 디자인한 생활용품 시리즈 ‘훈민정화’, 그리고 컵 손잡이를 한글 자음 형태로 만든 머그컵 등 다양한 신제품이 눈에 띈다. 한글 자음을 인쇄한 티셔츠도 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ㄱ, ㄴ, ㄷ···. 등의 자소를 나열하는 초보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한글이 제품과 화학적 결합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같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한글 대신 어느 문자가 들어가도 제품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이다.
이런 제품 소개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문구도 있다. ‘아름다운 한글···’이 그것이다. 말하는 사람이나 적는 사람이나, 한글이 아름다우니 한글을 활용한 제품 역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는 듯하다. 어느 정도 관성적인 면도 느껴진다. 그런데 이들은 솔직히 말하면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특별한 행사나 부스에서만 일시적으로 주목받을 뿐 일상 사용자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명분도 충분한 이런 제품들이 정말 예쁘다면 전국적인 히트 상품이 하나쯤 나왔어야 했는데 그런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이런 괴리는 한글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적 혼동 때문이다. 위에서 예로 든 제품에 쓰인 서체는 일반적으로 고딕체라 불리는 군더더기 없는 것들이다. 한글 고딕은 장식이 배제되고 기하학적인, 한마디로 기계적인 모습이 특징이다. 이런 서체는 실생활에서 폰트로 쓰일 때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일상 제품에 장식적 요소로 올라가는 한글은 다른 모양이어야 한다. 훈민정음 창제기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모습에서 벗어나서 획을 큰 폭으로 변형하고, 한글이 얼른 읽히지 않고 그림(그래픽)으로 보일 만큼 과감한 디자인을 시도함으로써 장식적인 미를 찾아야 한다. 한글을 뼈대 그대로 두지 말고 그 위에 창조적인 살을 붙여 제품과의 결속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2024년 새해를 맞아 아모레퍼시픽 한율이 선보인 ‘한글 컬렉션: 한글로 쓴 한율’ 패키지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단순히 자소를 나열한 것에서 벗어나 두꺼운 서체와 얇은 서체를 결합하고, 자소 간 투명도를 조절하고, 모서리를 꺾고 굴리는 등의 요소를 추가하여 패키지를 꾸몄다. 물론 이 역시 아직은 너무 정직하다. 그러나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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