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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인잡] 노동시간④ 나의 가짜노동 고백기

절차 및 과정에 에너지 낭비 다반사…AI 시대, 왜 우리는 여전히 '절대적 시간'에 목을 매는가

2023.12.22(Fri) 11:28:44

[비즈한국] 얼마 전 웨비나에서 ‘가짜노동’​을 쓴 저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의 기조발제를 듣다가 몇 번이고 기립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는 “주당 52시간이라니, 그건 정말 말이 안되는 겁니다!” 였다. 그러면서 그는 정확히 50시간을 기점으로 하여 바닥으로 끝없이 곤두박질 치고 있는 ‘노동시간 대비 생산성’ 그래프를 제시했다. 감사합니다. 데니스.

 

우리가 얼마나 의미없이 ‘텅 빈 노동’을 하며 주당 근로시간을 채우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책 ‘가짜노동(pseudoworkd)’​은 이미 몇 개월 전 ‘​알쓸별잡’​이라는 TV프로그램을 통해 언급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어렵게 빌려 읽은 책을 완독한 김에 나의 가짜 노동도 고백해보려 한다.

 

데니스 뇌르마르크 ‘가짜노동’​ 사진=네이버 도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 한 권의 고유한 책이라면, 나는 그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종이책 또한 한 번에 여러 권을 두고 교차로 읽는 편인데 이 책, 저 책을 읽으면서 나름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거나 그 안에서 새롭게 세계가 확장될 때 큰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담당했던 여러 일 가운데 인사팀 업무가 적성에 꽤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사팀을 찾아오니 말이다. 

 

대부분의 직원들 -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는 경우 - 은 메신저나 전화로 연락을 하면서 제일 먼저 이렇게 묻는다. “지금 많이 바쁘시죠?” 어쨌든 전화를 받았다는 건 누군가와 대화할 시간조차 없을만큼 죽도록 바쁜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회의나 보고 때문에 자리를 비웠거나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면 전화를 받지 않았을 테니까. 바쁘냐고 묻는 말에 “그렇다”고 답하면 보통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때문에 아무리 눈앞에 일이 쌓여있을지라도 “괜찮다”고 답하려고 애쓴다. 

 

직장 내 괴롭힘, 혹은 성희롱과 같은 고충을 털어놓는 경우라면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대상자를 만난다. 그가 면담실로 찾아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 이런 이들은 한 순간 스스로 책장을 덮어 버릴 수도 있고, 언제든지 방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빨리 읽어야 하는 책이다. 최대한 공들여 이야기를 듣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파악하고 이와 관련한 회사의 규정을 설명하고, 정식절차를 밟으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틈틈히 진행과정을 공유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그 직원과 수시로 소통한다.   

 

이것이 인사팀 사무노동자의 가장 근본적인 노동, 즉 진짜 노동이다. 내 일이 누군가에게 쓸모있고 의미있는 행위가 되고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런 일을 하는 스스로에게 대견스러운 마음과 성취감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의 성과지표(KPI)가 되지 못한다. 직접 계량화될 수 없으며 눈에 띄지도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만 불필요한 문서 작업이 늘어난다. 문제를 직접 해결 할 시간에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상사와 관리자에게 보고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그 과정에서 괜히 상사가 한 두마디 거들거나 나름 ‘아이디어’라며 핵심업무를 벗어난 추가 명령 - 문항이 수십개가 넘어가는 직원 설문조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 이라도 내리면 일은 배로 많아 진다. 

 

인사위원회에는 누구를 부를 것이고, 그들을 자리에 어떻게 앉힐 것이며, 식사는 어떻게 할 것인지와 같은 계획을 세우고, 이를 보고하기 위한 문서를 만들고, 심지어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한 ‘위원회 안건’을 보기 좋게 만들고 회의장소를 세팅하는 동안 대부분의 에너지가 고갈된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직원과 소통하고 그의 스트레스를 돌보는 일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이런 가짜 노동에 쓰여져 왔다. 그렇게 보여주기 위한 일에 시간을 쓰다 보면 결국 중요한 순간에 제 때 응답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책 제목만 덩그마니 적혀있는 ‘읽어야 할 책 목록’만 계속 늘어나고있는 듯 하다.      

 

모든 사람들이 AI와 챗GPT로 대체될 수많은 일자리를 걱정한다. 화이트 칼라의 사무노동자 중 한 명인 나 역시 크게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먼저 없어질 일자리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지난 수십년 동안 엄청난 기술과 과학의 진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시간에 허덕이고 있으며 번 아웃을 겪는다.  

 

특히 세계 최고의 IT강국이라고 자랑하는 나라의 노동자들이 가장 긴 시간을 일터에서 보낸다. 자기 자신이나 가정, 가족을 돌보는 데에는 시간을 쓰지 못해 출산율은 곤두박질 친다. 그런데 2023년 한 해 동안 주당 최대 근무시간을 52시간에서 69시간으로 확대하는 정책을 새롭게 만들어 발표하고(3월), 대국민 설문조사를 하고(6월~7월), 그 결과를 집계하여(9월) 발표하고, 결과적으로 ‘없던 일로 하기로 결정’하는 데에(11월) 꼬박 일년의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시간과 노동력이 투입되었을까. 무엇이 가짜 노동인가 묻고 싶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  

김진 HR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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