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한국인이라면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이 마지막 대사를 알 것이다. 절묘한 반전과 반어적 감정이 어우러진 빼어난 소설로, 이 소설 덕분에 한국인들은 어떤 콘텐츠에서 ‘운수 좋은 날’이라 강조한다면 그것이 결코 운수 좋은 날이 아닐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운수 좋은 날’의 제목을 패러디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운수 오진 날’도 그렇다. ‘평범한 택시기사가 고액을 제시하는 장거리 손님을 태웠는데 알고 보니 그가 연쇄살인마더라’는 내용만 봐도 그렇다.
‘운수 오진 날’은 아포리아의 네이버 웹툰 ‘운수 오진 날’을 원작으로 한다. 택시기사 오택(이성민)은 어느 날 꿈에서 돼지들이 우글우글거리는 돼지꿈을 꾼다. 아침부터 부리나케 로또를 산 그는 그날 연이어 손님을 태운다.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거액의 빚을 진 오택은 현재 아내와 이혼했지만 전처와 딸과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마음 따스한 인물. 딸의 다음 학기 등록금이 내일까지 필요한 상황에서, 어느 손님이 묵포까지 장거리 탑승을 요구한다. 내친 김에 ‘따블’이 넘는 100만 원을 제시했더니 그것도 흔쾌히 오케이란다. 이 괴상한(?) 행운에서 이미 시청자는 짙은 불안을 감지한다.
누구나 탈 수 있는 택시, 그 택시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연쇄살인마와 장시간 함께 단둘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공포스럽다. 게다가 자신의 정체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연쇄살인마 금혁수(유연석)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통각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칼로 그어버리는 이 미친 살인마의 손바닥 안에서 오택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금혁수는 자신의 딸 승미(정찬비)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운수 오진 날’의 구도와 설정은 많은 작품을 오버랩시킨다. 택시기사와 살인마의 동행은 제이미 폭스와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았던 ‘콜래트럴’을 연상시키고, 달리는 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스피드’ ‘로크’ 등 숱하게 많다. 자녀를 잃고 범인을 끝까지 추격하는 ‘윤호 엄마’ 황순규(이정은) 캐릭터도 익숙하다. 이 익숙함을 긴장감 있게 지속시키는 것은 배우들의 힘. 유연석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4’ ‘미스터 션샤인’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으로 다져진 순정남 이미지를 단숨에 벗어 던지고 광기 어린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는 연쇄살인마가 되어 충격을 안긴다. 택시 안에서 끊임없이 수다를 늘어 놓다가도 어느 순간 섬뜩하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이 유연석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될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성민은 사람 좋게 허허 웃던 평범한 택시기사에서 연쇄살인마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아버지로 거듭나며 극강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이성민은 역시 이성민이다. 이성민이 연기하는 오택의 이미지는 지난 11월 24일 공개했던 파트1(1~6화)과 12월 8일 공개한 파트2(7~10화)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파트1에서 사람 좋게 허허 웃던 평범한 택시기사였다 연쇄살인마를 태우며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면, 파트2에서는 연쇄살인마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집요하게 복수를 다짐하는 아버지로 모습을 달리한다. 대상으로 한 사람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화 ‘리멤버’와 드라마 ‘형사록’의 모습도 설핏 겹쳐지지만, 그보다 절절한 아버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들을 잃고 금혁수를 추적하는 황순규로 분한 이정은의 열연도 빛난다.
‘운수 오진 날’은 파트2부터 원작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인지라 원작을 봤던 이들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몰입할 수 있다. 압도적인 스릴과 서스펜스가 일품이다. 다만 전 과정에서 연쇄살인마가 자행하는 온갖 악행들이 과하게 전시되는 느낌이 불쾌함을 줄 순 있다. 악인의 악행을 강조하겠다는 의지는 알겠으나 ‘굳이 이렇게까지?’라는 의문이 생길 만큼 잔혹한 장면들이 도처에 등장하기 때문에 고어물, 슬래셔물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시청을 권하지 않는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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