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인사업무를 담당한 초기 3년간 직속 상사였던 임원 L은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다. 모든 일에 있어 엄격한 도덕 원칙과 규정 준수를 잣대로 들이밀었고 그만큼 융통성도 관용도 없기로 이름 높았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여러모로 주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데 그에 대한 세평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임원의 위치에 올라 다행이지 중간관리자 급일 때는 팀원들을 과도하게 ‘마이크로매니징’*하는 바람에 주요 기피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바짝 긴장한 채로 첫 업무보고를 들어갔는데 의외로 합리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꼼꼼함은 성격 탓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보니, 이전에 경험했던 리더들에 비해 업무에 대한 이해도 높고 원칙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의사결정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장점처럼 느껴졌다. 특히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보수적으로 보일지라도 원리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좋은 파트너십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다.
실제로 그의 리더십은 직원 채용 과정 등 공정성을 담보로 하는 일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전문 경력직을 공개채용 하는 과정에서 채용요청 부서의 임원 C가 노골적으로 특정 지원자의 합격을 요구해 왔다. 당시 평가자는 C와 L 외에 외부에서 참석한 두 명의 전문가가 있었고, 필기와 프리젠테이션, 최종면접의 전 과정에 대한 합산 점수로 최종 합격자가 결정되는 방식이었다.
C는 본인이 생각하는 적임자와 필요한 인재상에 대해 최종면접 과정에서 평가위원들에게 충분히 어필을 했고 위원들은 개별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최종결과 C가 원한 인물이 아닌 다른 면접자가 합격했다. C가 뽑고 싶었던 지원자는 엄청난 고학력과 스펙을 자랑하는 소위 엘리트였고, 최종합격자로 결정된 이는 엘리트까지는 아니었지만 요구하는 지원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으며 유사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이 있는 자였다.
둘 다 훌륭한 지원자였기 때문에 누가 합격하더라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과거 다른 글(신입채용 4. 탈락한 이유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다)에서도 얘기했듯이 엇비슷한 조건의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자리에서 최종 당락은 결국 운칠기삼이다. 길게 봤을 때 이 조직에 더 적합한 사람이 누구일지, 누가 더 훌륭한 성과를 낼지는 용한 무당이라 해도 장담할 수 없다.
허나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C는 자신이 찜했던 지원자가 불합격하자 최종점수를 임의로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자 그는 매우 화를 내며 자리로 돌아간 후 메신저와 SNS 등으로 며칠간 지속해서 필자와 담당 직원을 괴롭혔다. “소탐대실 하지 말고 숲을 봐라”거나 “내가 그 업무 해봐서 아는데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결국 회사가 손해 본다”며 회유하다가 끝내는 경영자에게 정식으로 문제제기 하겠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C 역시 L의 성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같은 계급장끼리 붙지는 못하고, 아래 직급의 사람들만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결국 L에 상황을 보고했는데 그는 원안 그대로 결재하며 “다른 건 몰라도 인사만큼은, 그중에서도 채용만큼은 원칙대로, 곧이곧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일하는 사람이 다치지 않는다. 소신껏 잘 거절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혹여 C의 기세에 눌려 ‘그깟 거 부서에서 원하는 대로 해줘라’라고 나오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던 터라 L의 말은 큰 힘이 되었다.
이후로도 L의 그 말은 임원들이 무리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할 때마다 단호하게 ‘NO’라고 말하거나, 계급장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든 설령 본인에게조차 대들 수 있게 하는 ‘저항의 원동력’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던 최종 합격 직원은 아주 훌륭하게 성과를 내며 5년째 잘 지내고 있고 C 임원은 사건이 있고 1년쯤 지난 후 필자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법과 원칙, 규정과 제도, 윤리강령에 적힌 내용에 얽매여 일하다 보면 간혹 원칙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될 때가 있다. 윤리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이치와 도리이고,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하지만 윤리고 양심이고 간에 결국 사람이 자의적으로 내리는 판단이므로 가치관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 역설적으로 옳은 행동과 결정이 모인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결과를 낳는 것만도 아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분초 단위로 소비되고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는 이왕이면 융통성 있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임기응변적인 리더십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고리타분하지만, 여전히 흔들림 없이 원칙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이크로매니징 : 주로 임금노동자를 과도하고 세밀하게 감독, 통제하고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관리형태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핫클릭]
·
[알쓸인잡] 리더십과 팀워크① 실패 경험이 많은 리더가 팀을 승리로 이끈다
·
[알쓸인잡] 노사관계⑤ 박쥐가 될 수 밖에 없는 인사팀의 생존비법
·
[알쓸인잡] 노사관계④ 성평등지수 1위 아이슬란드의 '여성 총파업'을 보며
·
[알쓸인잡] 노사관계③ 복수노조 갈등, 다수가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
[알쓸인잡] 노사관계② 회사에서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방법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