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부가 사각지대에 놓인 다가구주택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해 공공이 건물을 매입해 임차인을 구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특별법이 보호하는 대상이나 요건에 제약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기관이 직접 개입해 여러 세입자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겠다는 구상이다. 계획이 구체화되면 대전 등 다가구주택 피해자에게 적용 가능한 지원책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통매입 방식의 현실성을 두고는 시각이 엇갈린다. 어떤 기관이 무슨 기준으로 집행할지 등과 관련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뒤따른다.
#전세사기 특별법 닿지 않는 다가구, 뒤늦게 추가 구상
건물 전체가 한 사람 소유인 다가구주택은 6월 시행된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거주 주택 경매·공매 유예 및 정지, 피해주택 우선매수권 부여, 매입임대주택 전환 등 정부가 내놓은 주요 대책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다. 국토교통부가 다가구주택에 적용할 구제책을 추가로 구상하는 이유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합동 브리핑에서 “다가구에 대해서는 우선 LH 같은 공공지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통으로 매입한 뒤 임차인들 사이 이해관계를 공공이 맡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법적 한계로 사적 재산권 취급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조정에 나서겠다는 설명이다.
특별법 제정 당시부터 “구제된 피해자보다 배제된 피해자가 더 많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자 지원 폭을 확대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다가구주택 피해자가 많은 대전은 특히 전세사기가 발생한 지역 중 구제가 더딘 곳으로 꼽힌다. 한국도시연구소 등이 8월 말 한 달간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단독·다가구주택은 전체 피해 사례 중 20% 수준이었지만 대전에서는 80%를 넘겨 지역별 편차가 컸다. 연립·다세대 비율이 절반 이상인 서울·경기나 오피스텔 피해 비중이 가장 높았던 인천(37.1%), 부산(58.2%)과 대비된다. 국토부가 인정한 대전 지역 전세사기 피해자는 총 446명으로 다가구주택 피해(95%)가 대다수다.
전세사기 특별법이 보장하는 보장권들은 다가구만큼은 예외다. 다가구주택과 다세대주택은 외관상 똑같이 빌라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가구는 건물 한 동을 한 명이 소유해 단독주택의 범주에 드는 반면 다세대는 개별 호수마다 등기가 다르다. 다가구주택은 등기부등본을 떼도 개별 호수 세입자가 나오지 않아 계약을 맺기 전에는 다른 임차인 정보를 알 수 없다.
일례로 세입자가 보증금을 변제 받으려면 피해 주택을 경매에 부쳐야 하는데, 건물이 한꺼번에 넘어가는 다가구는 경매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주택이 낙찰되더라도 선순위 권리자부터 순서대로 배당 받기 때문에 후순위 세입자는 배당을 받지 못할 수 있다. 대전의 경우 보증금 일부라도 되찾을 가능성이 있는 최우선 변제대상은 23가구(9.7%)에 불과했다.
특별법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되면 우선매수권을 부여 받을 수 있지만 이 역시 다가구주택에는 적용하기 어렵다. 10명의 세입자 중 한 명이 우선매수권을 쓰고자 하면 나머지 9명의 세입자가 모두 동의해야 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통매입 현실성은 ‘글쎄’
이 같은 상황에서 나온 정부의 ‘통매입’ 구상을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현장에서는 정부가 다가구 맞춤 대책에 나서는 모습을 반기면서도 공공이 매입해 세입자 간 입장을 조율하겠다는 계획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입을 모았다.
사업시행기관으로 거론되는 LH의 주택 매입 기준이 까다로운 점은 현실적인 문제로 꼽힌다. 정부가 피해 주택의 공공 매입을 제도화해도 LH의 자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사실상 유명무실한 대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LH의 경우 주택에 불법 건축물이 포함되면 매입하지 않는 등 기준이 까다롭다. 지원책에 이 같이 조율이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도 포함돼야 한다”며 “정부가 ‘사겠다’고 장담해놓고 사업시행기관이 ‘못 산다’고 하는 엇박자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LH는 업무처리지침에 따라 불법 증축건축물 등은 원칙적으로 매입할 수 없고 불법 사항을 고쳐 구조상 문제가 없는 경우에만 매입이 가능하다.
공공 매입 시 가격 기준을 두고도 이견이 이어질 수 있다. 가격을 낮게 책정하면 임대인·임차인이 동의하지 않을 여지가 크고, 비싸게 사면 ‘부실 매입’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피해자들은 피해 최소화에 초점을 맞춘 구제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전 지역 전세사기 피해자 A 씨는 “다가구는 거주하던 집을 우선매수권으로 살 수도 없고 개별 등기도 어려워 말 그대로 당장 나앉게 생긴 상황이다. 그 와중에 전세사기 건물에 무분별하게 담보대출을 내준 새마을금고 등 은행권이 선순위 채권자”라며 “매입 후 단순 임대를 주는 방식으로는 보증금 회수가 안 된다. LH가 감정평가액에 가까운 금액으로 사서 피해자들에게 순차적으로 변제하고, 후순위 피해자들에게는 장기 임대를 적용하는 식으로라도 피해를 줄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합동 브리핑 이후 입장문을 내어 “정부가 피해자들의 보증금 채권이나 선순위 금융기관 채권을 매입해 피해자들에게 일부라도 보증금을 돌려주고, 경매·공매나 범죄수익 환수를 통해 회수하는 ‘선(先) 채권매입 후(後) 구상권 청구’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부는 다가구와 함께 사각지대로 여겨지는 신탁 전세사기에 대해서도 대책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다가구에 준하는 방식으로 공공이 우선 법률관계 조정을 떠안고 그 다음 임차인들을 구제한다는 방침이다. 최은영 소장은 “매입 방식 외에 다세대로 용도 변경 허가 등 다양한 선택지를 포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현석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세사기·깡통전세는) 원인도 복잡하고 해결 방법도 사례마다 제각각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전반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지는 추후 매입 관련 예산 규모 등 정책의 세부 사항이 나온 뒤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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