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을밀대’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20대 때 처음 입문한 이후 곳곳의 이름난 평양냉면 전문점을 도장깨기 하는 와중에도 늘 마음속 3위 안에 손꼽는 식당이다. 그래서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을밀대를 그저 평양냉명 전문 식당의 상호로만 알고 있었다. 마치 북한의 옥류관처럼 말이다.
노사관계를 얘기하는 중에 뜬금없는 평양냉면 타령이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책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김이경, 한겨레출판사 2021)’를 읽다가 알게 된 강주룡이라는 여성 노동운동가 덕분에 나에게 을밀대는 이제 단순히 평양냉면 전문점 그 이상의 존귀한 무엇이 되었다. 을밀대가 고구려 시대에 평양성에 세워진 정자의 이름으로 북한의 국보라는 사실도 부끄럽지만 그때서야 알았다.
강주룡(1901~1932)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평양에 있는 평원 고무공장에서 고무신을 만들던 여성 노동자였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여성 노동자의 삶이란 남성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임금(일본 남성과 비교하면 4분의 1)을 받으면서 희롱과 폭언, 폭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이를 출산한 직후에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젖먹이를 안고 나와 일터에서 젖을 물려가며 일해야 했다.
1931년 평원 고무공장 사장은 노동자 임금을 일방으로 삭감했는데 이에 반대하여 여성 노동자 49명이 집단 파업에 나섰지만, 고용주는 이들을 모두 해고했다. 강주룡 또한 동료들과 단식투쟁에 나섰다가 해고되었는데 그 직후 목메어 죽으려고 무명천을 들고 을밀대 지붕에 올랐다가 그곳에서 여성의 노동 생활 참상을 고발하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알리는 고공농성을 벌였다. 비단 자신이 속한 공장 동료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당시 평양의 여러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2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대신하여 목소리를 낸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이었다.
당시 평양의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2000여 명 노동자의 3분의 2가 기혼 여성 노동자였다. 이들은 임금 삭감과 해고철회 외에도 산전 산후 3주간 휴양, 수유 시간 자유 같은 여성 노동권 개선도 함께 요구했다.
100여 년 전부터 단단하고 굳건하게 목소리를 냈던 강주룡 같은 이들 덕분에 기혼 여성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40대가 되도록 이 험난한 대한민국에서 어떻게든 경력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다.
모성보호법 덕분에 유급 육아휴직도 사용했고 출산 후 3주가 아닌 3개월의 휴가(온전한 휴가와 휴직은 아닌 또 다른 노동의 시작이었지만)도 보장 받았다. 그나마 사무노동을 하고 고용 안정성이 보장되는 규모의 회사여서 가능하지,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실제로 나와 비슷한 또래 여성들은 4명 중 1명꼴로 경력 단절을 경험했다. 이는 다양한 통계자료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고학력에 출중한 능력을 갖춘 이들조차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데에는 육아를 비롯한 가사 돌봄이 가장 큰 사유가 된다. 비단 영유아뿐 아니라 우리가 먹어야 하는 세끼 밥, 위생적인 환경은 누군가 또는 자기 자신의 가사/돌봄 노동 없이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거나 이를 마땅히 유급화돼야 할 ‘노동’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당연히 제공되는 무상 서비스로 착각하거나 그 가치를 저평가한다.
지난 10월 24일 아이슬란드에서 모든 여성노동자의 24시간 전일 파업이 벌어졌다. 1975년 최초의 여성 총파업 이후 48년 만이다.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성평등지수에서 아이슬란드는 14년째 세계 1위다. 2022년 기준 OECD 국가의 성별 임금 격차를 보면 아이슬란드는 7.4%이지만, 한국은 31.2%로 꼴찌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 여성노동자들은 무급 가사노동자와 청소, 병간호와 같은 돌봄 직종 노동자의 저임금 저평가, 성폭력 근절을 중심으로 더 나은 성 평등권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들어갔다. 여성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여성 장관들도 모두 참여해 하루 동안 사무실 문을 닫고 연대하며 힘을 보탰다.
같은 시기 우리나라 정부는 민간 위탁으로 운영하던 여성고용평등상담실의 2024년 예산을 전액 폐기했다. 여성폭력 방지 및 성폭력 피해자, 청소년,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 지원을 위한 예산도 대폭 삭감했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78명에 불과하다. 청년세대의 60% 이상이 결혼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인구절벽이 아닌 인구소멸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노동자가 안정적으로 일을 지속하며 아이를 낳고 키우기가 녹록지 않으며, 무급 혹은 저임금의 돌봄노동을 하며 국가의 노동생산성을 떠받치고 있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아이슬란드 여성 총파업 1주일 후인 11월 1일, 우리나라 20여 개 여성단체가 모여 내년 3월 8일 국제여성의 날에 진행할 ‘여성 총파업’을 준비하기 위해 조직위원회를 출범하고 기자회견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언론 보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wir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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