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새내기 시절 춘삼월의 봄은 ‘등투(등록금 투쟁)’로 기억된다. 국립대학교가 아니면 절대 보내지 않겠다던 부친 때문에 어렵게 합격한 사립대학교의 비싼 입학등록금은 모친이 20여 년간 가사와 돌봄노동을 전담하며 생활비 끝전을 모아 만든 비상금 통장을 깨서 납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상경해 ‘캠퍼스’를 밟은 개강 첫날, 나를 반긴 것은 ‘등록금을 인하하라’는 학생들의 선전전과 대자보였다. 모친 덕에 힘들게 마련한 수백만 원의 등록금은 알고 보니 학교에서 논의 없이 전년 대비 15%나 인상한 금액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데 그만 알아버렸다. 알면 알수록 가만히 있기 힘들어졌다. 국고보조금, 재단(법인)전입금, 전체 총회, 비상대책위원회, 수업 거부 총파업, 연대투쟁. 신문 사회면에서나 읽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대화와 조정 요구가 여러 차례 좌절되자 선배들은 삭발과 단식을 했고 우리들은 총장실과 행정지원실이 있던 본관 건물을 50일간 점거했다.
단체행동 끝에 인상률이 10%로 조정되고 모든 학생의 통장으로 일부 금액이 반환되었다. ATM이 뱉어낸 통장에 학교 이름으로 찍혀있던 십몇만 원의 입금내역은 승리 혹은, 성취감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을 느끼게 했다. 이후에도 매년 봄마다 등투는 있었지만,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긴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여러 사람이 마음과 힘을 한데 뭉치면 보잘것없던 이의 목소리도 권위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값진 경험이었다. 덕분에 졸업할 때까지 수년간 ‘여기는 내 학교, 내가 만들어 가는 곳’이라는 주체성을 갖고 생활했다.
모든 근로자가 보다 나은 일터를 만들기 위해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단체교섭 및 단체행동을 하는 것은 무려 헌법으로 보장된 국민의 권리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단결한 노동자 집단, 즉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시선은 굉장히 부정적이다.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며 폄하하고 불편해한다. 노동조합의 목소리가 커지고 단체행동을 하면 회사경영과 더 나아가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시민에게 불편함을 끼치며, 그로 인해 내 몫이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우리 대다수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국세청 통계상 근로소득세를 내는 임금노동자는 약 2000만 명이다.) 노조, 파업, 단체행동에 대해서만큼은 ‘전지적 사용자 시점’을 갖고 눈살을 찌푸린다.
정작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게 된 계기, 단체행동을 하게 된 배경과 이유, 쟁점이 되는 사항인데도 불구하고 미디어에서는 ‘집단 이기주의’, ‘밥그릇 지키기’와 같은 표현을 사용해 현상에만 집중한다. 파업의 여파로 ‘시민에 불편을 끼쳤다’라거나, ‘수출 빨간불, 경제 악영향’과 같은 경제적 손실만을 언급하며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참고 :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문방송 모니터 보고서, 2023.9)
이로 인해 우리는 파업을 하는 이들과 같은 노동자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활동과 파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너무나 손쉽게 그들을 타자화(특정 대상의 정체성을 임의로 규정하고 나와는 다른, 혹은 열등하고 분리된 존재로서 부각시키는 것) 시켜 버린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금노동자 가운데 노동조합에 가입된 근로자 수는 2021년 기준 총 293만 명으로 조직률은 14%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최근 5년 사이 비정규직, 여성, 고령, 저임금, 특수고용직 등 노동권 보호가 절실한 소외된 근로자들을 중심으로 노조 가입률과 조직률이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을 면치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과연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소리를 높이고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안전하고 좋은 노동환경을 갖추고 있는가? 노동자로서 혹은, 국민으로서 합당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보다 경영자(사용자)를 대신해 기업의 이윤을 고민하고 국가를 대신하여 사회적 비용을 걱정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고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느 경영자든 직원이 업무와 조직에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를 기대한다. 국가는 국민이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애국심을 갖고 국민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기를 바란다. 그런 것을 우리는 주인의식이라고 한다. 주인의식은 권위 있는 누군가가 ‘가져라’ 혹은 ‘갖자’고 주창한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는다. 모든 개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보장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 다른 이와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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