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사회 초년생 시절, 존경하며 따르던 선배가 있었는데 몇 가지 이유로 최근 몇 년 새 사이가 멀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모든 말을 너무 적나라하게, 그리고 신랄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처음 그와 가까워진 계기도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일진 같은 아우라를 풍기며 ‘초면에 미안한데 옥상에서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호출하더니, 그동안 별 생각 없이 했던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해 뒤에서 험담하고 수군대는 다수의 무리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네가 눈치가 없고 몰라서 그런 듯하니 당분간은 보여주기식 ‘저자세 전략’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며 충고로 받아 들일지, 기분 나빠하고 넘길지는 자유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극히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조직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쿨내가 진동하는 여자 선배라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일도 잘하고 스마트하며 진취적인 사람이어서 업무적으로 배울 점도 많았다. 성향도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직장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 대한 조언도 구하는 ‘직친’사이가 되었다.
업무나 일상에 대한 객관적이거나 전문적인, 혹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에서 끝나면 좋았을 텐데 문제는 여기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업무로 얽혀있는 수많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다는 식의 부정적인 평가와 감정을 쏟아내는 일이 잦아졌다. 간혹 견해가 달라 반박하려 하거나, 그 사람도 나름 노력하는 중일 것이라며 타깃이 된 희생자를 대변할라치면 ‘네가 잘 몰라서 그런다’며 일축하거나 말을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대나무숲 역할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듣기 좋은 소리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면 괴로운 것을, 부정적인 감정을 강화하는 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의 나머지 시간마저 안 좋은 타격을 입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후배 관계이기는 하나 직장 동료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점점 한 축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러다 언젠가는 그의 모진 말끝이 나를 향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이미 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러서야 선을 긋고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마침 인사업무를 맡게 되면서 업무 특성상 누군가의 세평에 휘둘리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그리고 육아와 회사 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지독히 바쁘다는 것을 방패 삼아 그의 사적인 전화나 문자를 피했다. 사내 정치나 뒷담화, 인간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대화가 길어진다 싶으면 ‘미안하지만 듣고 있기 불편하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하고 과거를 운운하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인사관리 업무는 대외비가 생명’이라는 대의명분 덕에 거리 두기 또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고 기울어졌던 관계의 주도권도 다시 찾았다.
얼마 전부터 그를 지칭하는 듯한 내용의 글과 이름 초성이 블라인드 게시판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능력이 출중하고 전문성을 인정받아 보기 드물게 초고속 승진을 했고 ‘성공한 직장인’의 표본 같은 이였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위에 너무 많은 부정적인 말의 씨앗을 뿌린 것이 원인이었다. 어떤 특정인에게 공공연하게 폭언을 하거나 갑질이나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할만한 구체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과하게 직설적인 화법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평가에 상처받은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었다. 급기야 익명의 투서가 노동조합 사무실에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익명 제보여서 그의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본 누군가를 특정하기는 어려웠고, 내용 또한 객관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카더라’ 성 소문과 그의 말투에 대한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신고가 접수된 이상 당사자 면담을 비롯한 사실관계 조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면담 자리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직설적인 성격상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익명성’이었다. 모든 소문에 직접 해명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부주의한 말로 상처 입은 대상자들에게 공개 사과글을 게시하고 싶다고 했다. 그간 누군가를 향해 뱉었던 모진 소리에 종국에는 자신의 마음이 금이 가버린 것이다.
인사업무를 하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 간접경험을 하면서 반면교사로 삼을 일을 많이 겪는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 역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을 게 분명하다. 한때는 나와 닮은 사람, 닮고 싶은 선배라고 생각했던 그의 풀죽은 모습 속에서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기억할 수도 없는 누군가에게 혹여 내가 남겼던 모진 소리는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후회한다.
회사는 남들에게 감정적으로 인정받고 친목을 다지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니는 곳이다. 그러니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할 필요도, 원한다고 그렇게 지낼 수도 없는 곳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왕이면 부정적인 비난보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모질고 모난 소리 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나누며 지내고 싶다.
필자 김진은?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을 합쳐 3000명에 달하는 기업의 인사팀장을 맡고 있다. 6년간 각종 인사 실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과 비법을 ‘알아두면 쓸데있는 인사 잡학사전’을 통해 직장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핫클릭]
·
[알쓸인잡] 인간관계⑤ 경조사비 딜레마, 우리는 왜 돈으로 축하와 위로를 셈할까
·
[알쓸인잡] 인간관계④ 신입사원에게 필요한 슈퍼파워 '눈치력'
·
[알쓸인잡] 인간관계③ 직장 동료와 지켜야 할 적정 거리는 '1m'
·
[알쓸인잡] 인간관계② 직장 내 주먹다짐 사건,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
[알쓸인잡] 인간관계① 퇴사하면 '완벽한 타인' 어떻게 남길 것인가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