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35년간 공공기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은퇴하신 아버지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손떼 묻은 공책이 있다. 바로 경조사비 출입내역이 적혀있는 장부다. 지금도 청첩이든 부고든 연락을 받을 때면 이 공책부터 펼쳐드신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 역시 ‘경조사비는 기브 앤 테이크다. 반드시 장부로 적어두고 관리해라’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 사이의 친밀도를 어떻게 돈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싶지만, 경조사 때만큼은 그와 나 사이가 ‘얼마의 가치’로 치환되는지를 만원 단위로 아주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 솔직히 직접 청첩장을 만들어 회사에 돌리기 전까지는 그 일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멋쩍으며 큰 용기와 뻔뻔함을 필요로 하는지 잘 몰랐다. 별로 가깝지 않은 이의 소식에 ‘축의(부의)금 해야해? 말아야해?’ 망설이거나, 봄, 가을마다 쌓이는 청첩장에 부담스러워 하던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누군가도 나처럼 이 청첩장을 고지서처럼 받아들면 어쩌나 하는 역지사지의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달까.
어쨌든 식을 마치고 나름의 경조사 대장을 만들었다.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고두고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간 회사에서 그럭저럭 무탈하게 지냈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산더미처럼 쌓인 빚더미에 앉은 느낌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경조사비는 받으면 무조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돈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액수는 둘째치고 전국 각지에서 도달한 예상밖의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들로 없던 애사심도 생겨날 만큼 마음의 빚을 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장에는 축하해준 이들의 이름만 빼곡히 적혀있다. 멀리서 직접 왔거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들은 별표도 쳐놨다. 하지만 ‘경조사비’ 금액란은 없다. 귀차니즘이기도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의 액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만 19~34세 청년 10명중 6~7명이 결혼에 부정적이라는 통계청 기사를 봤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주된 이유는 ‘결혼자금 부족’이란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에는 예식장의 평균 식대가 5만 원을 훌쩍 넘기 때문에 웬만큼 친하고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축의금만 보내고 안가는 것이 예의라는 기사도 있다. 축의금은 겨우 5만 원 해놓고 가족을 데리고 와 식사를 하고 가는게 말이 되냐며 뒤에서 흉을 보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경조사에 얼마를 내야 덜 손해 보는 장사가 되고 수지타산이 맞는지, 얼마를 내야 혹은 얼마가 있어야 경조사를 치를 수 있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오로지 돈의 논리로, 자본주의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것 같아 이런 기사를 접할 때면 아연실색해진다.
경조사.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 나의 결혼식에서 신랑 측 증인을 섰던 친구는 축의금을 내지 않았다. 그 사실도 본인이 나중에 그런 것 같다며 얘기해 주기 전까지 몰랐다. 하지만 인생 최고로 경사스러운 날에 가장 어려운 역할을 선뜻 맡아 주었고 넘칠 만큼 축하해 주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한국이 아닌 머나먼 타향에서 갑자기 전해진 동기의 불행한 소식에 마땅히 추모할 공간도 없었던 친구들은 학교에 모여 각자 추억하고 있는 기억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밤을 보냈다.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이들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축하와 불행한 일이 닥친 이들에게 건네는 마음 깊은 위로와 공감에는 아무 돈이 들지 않는다. 그저 따스하게 건네는 눈빛과 말 한마디, 내미는 손과 내어주는 어깨처럼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의 존재와 온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축하와 위로는 내가 받았기 때문에, 혹은 미래의 언젠가 받을 것을 예상하고 상대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챙겨받은 경조사에 대해서야 잊지말고 기억해두었다가 그만큼 성의를 되돌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꼭 돌려받을 먼 훗날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크고 작은 경조사를 겪는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금액이 적든 크든, 돈이 아닌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을 표시하며 지내는게 경조사비 국룰이면 좋겠다. 누구는 3만 원, 누구는 5만 원, 가족 동반하면 10만 원, 찐친이면 20만 원이 국룰이 아니라. 그것이 공책에 이름과 숫자를 남기지 않아도 관계를 오래도록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김진 HR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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